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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스페인] 마젤란, 인류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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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바다 태평양

 카를 5세 시기, 스페인에 가장 큰 영예를 가져다준 사람은 바로 마젤란(1480-1521)이다. 그는 스페인을 위해 향료제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고, 인류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심어주었다. 마젤란은 5척의 함대로 인류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실현했다.

 1520년 마젤란 함대는 버진곶을 경유 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통로 마젤란 해협에 진입했다. 변덕스러운 날씨와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38일 동안 마젤란 함대는 작은 섬과 해구 사이를 항해한다. 다시 남아메리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운 좋게 북동 무역풍을 만났다.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후 이들은 단 한 번도 폭풍을 만나지 않았다. 바다는 너무나 고요하고 잔잔했다.


인류 최초 세계 일주 항해

 16세기 초, 스페인 사람들은 이미 점령한 아메리카 영토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정한 경계선에 따라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이 선박마다 향료를 가득 실어 나르는 것을 보면서 배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정한 것은 대서양의 경계선이었다. 하지만 반대편 어딘가에 경계선이 끝나는 지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혹시 향료 제도가 스페인의 경계선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스페인이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 풍부한 항해 경력을 갖춘 한 포르투갈 사람이 스페인 국왕을 찾아왔다. 카를 5세는 이 포르투갈 사람에게 아메리카 최남단에서 시작해 향료제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가 바로 마젤란이다.

  1519년 9월 20일, 마젤란은 선원 250명을 태운 5척의 함대를 이끌고 인류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의 긴 여정에 발을 내디뎠다. 1520년 10월 21일 마젤란 함대는 남위 52도 버진 곶을 경유해 훗날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마젤란 해협에 진입했다. 이곳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통로였다.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암초가 널려 있었으며 날씨가 매우 변덕스러웠다.

 마젤란이 주변 탐사를 지시했던 배 한 척이 기회를 틈타 스페인 영토로 도망가 버렸다. 그 후 38일 동안 마젤란 함대는 미로같이 어지럽게 퍼져 있는 작은 섬과 해구 사이로 334마일을 항해했다. 마젤란 해협을 빠져나가자 앞에는 광활한 대양이 펼쳐졌다. 마젤란 함대는 칠레 해안선을 따라 북상했다.

 마젤란 함대는 남아메리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운 좋게 북동 무역풍을 만났다.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후 3개월 하고도 20일 동안 이들은 단 한 번도 폭풍을 만나지 않았다. 바다는 너무나 고요하고 잔잔했다. 그래서 이 대양을 태평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사실 마젤란은 몇 주면 이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가 예상한 거리는 실제 거리의 5분의 1밖에 안 됐다. 1세기가 지난 후 유럽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지도상에도 태평양은 실제 넓이의 반밖에 표시되지 않았다. 항해가 예상보다 길어지자 마젤란 일행은 식량난에 직면했다. 마젤란 함대와 함께했던 이탈리아인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이 태평양 항해 기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3달하고도 20일 동안 신선한 음식을 먹지 못했다. 먹은 것이라곤 오직 비스킷뿐이었다. 사실 비스킷도 비스킷이 아니라 구더기 덩어리였다. 우리는 너무 오래 담아 두어 악취가 풍기는 누런 물을 마셔야 했다. 돛대에 달린 소가죽까지 먹었다. 선원들 사이에 쥐 한 마리가 0.5 두카토에 거래됐지만 그마저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선원 중에는 위아래 잇몸이 심하게 부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어 죽는 이도 있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19명이었다."

 1521년 3월 6일 마젤란은 괌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필리핀 제도에 진입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27일 마젤란은 필리핀 원주민과 싸우던 중 숨졌다. 1522년 9월 6일 빅토리아호가 스페인 과달키비르강 하구에 진입했다. 다음날 스페인의 배가 와서 산전수전 다 겪고 녹초가 된 빅토리아호를 끌고 세비아 항으로 돌아왔다. 9월 8일 세비아 항의 스페인 사람들은 드디어 빅토리아호를 보았다. 3년 전 5척이 출발했지만 돌아온 것은 단 한 척뿐이었다. 더욱이 살아 돌아온 사람은 18명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 인류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에 성공했다. 다음날 이 18명의 영웅은 정장을 차려입고 촛불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세비야 항구에서 산타마리아 안티과 교회까지 맨발로 1마일을 행진하며 위대한 항해 도중 숨진 동료들을 추모했다.

 마젤란 함대의 또 다른 배 한 척은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도중 향료제도 중에서도 생산량이 가장 많은 테르나테와 티도르를 통과했다. 이곳에는 포르투갈이 세운 상관이 있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스페인 선박이 나타나자 불안한 마음에 테르나테 술탄과 이 섬의 정향을 독점할 수 있는 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스페인 선박이 향료제도에 나타난 것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위반한 것이라며 스페인 왕실에 정식으로 항의했다. 그러나 스페인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새로 발견한 지역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없다고 생각했다. 양국은 1524년 전문가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그렇지만 양측이 주장하는 위도 경계선은 46도나 차이가 났고 몰루카 제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이 달랐다.

 스페인은 특별히 전함 7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파견했다. 이 함대는 마젤란 해협을 지나 몰루카 제도로 향했으나 무사히 도착한 것은 1척뿐이었다. 이곳에서 스페인은 티도르 섬과 동맹을 맺고 포르투갈-테르나테 동맹군에게 대항했다. 멕시코의 코르테스가 또 다른 함대를 스페인에 지원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코르테스 지원군이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르투갈과 협정을 맺어야 했다.

 카를 5세는 35만 두카토에 몰루카 제도의 모든 권리를 포르투갈에 넘겨주었다. 1529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사라고사 조약을 체결했고, 몰루카 제도에서 동쪽으로 17도 지점에 양국의 분계선이 그어졌다.

 마젤란 세계 일주 항해 이후 유럽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했다.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한순간 이 세상이 10배나 커져 버렸다. 이제 서유럽 사람들의 눈앞에는 전 세계의 8분의 1이 아닌 완전한 하나의 세계가 펼쳐졌다. 이들은 나머지 8분의 7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앞다퉈 세계로 뻗어 나갔다. 중세의 전통 사유 방식이 지배했던 1,000년의 울타리, 편협하고 고지식한 사고체계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유럽인의 외계 시야만 아니라 마음속의 시야도 끝없이 넓은 세계를 향하게 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조금이라도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면서 점점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의 경쟁은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이 경쟁의 장에 뛰어들도록 자극했다. 세계를 무대로 전개된 각축의 장이 펼쳐지면서 이후 수 세기 동안 세계는 유럽의 손에 움직였다.

세계 일주하다 전사한 마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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