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브라질을 발견하다
마젤란은 세계 일주 항해를 하면서 배를 수리하기 위해 남아메리카 브라질 해안에 여러 번 기착했다. 당시 스페인 해군력은 포르투갈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마젤란은 매번 포르투갈 군함의 추격을 경계해야 했다. 마젤란은 이곳에서 항상 부하들에게 포르투갈의 영토임을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브라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정한 경계선 동쪽 포르투갈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스페인 함대가 함부로 이 지역을 들어오면 안 되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새로운 아메리카 점령지였다. 이곳은 훗날 포르투갈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1500년 3월 8일, 다 가마가 동방 항로를 발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군함 13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선원 1,200명을 태우고 테주강을 출발했다. 이들의 항해 목표는 인도였다. 이 대규모 함대는 무역 거래는 물론이고 대량 화물 운반 그리고 전투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함대를 이끈 사람은 카브랄이라는 포르투갈 귀족이었다. 그는 바스쿠 다가마가 개척한 항로를 따라 보자도르곶에서부터 정서 방향으로 항해했다. 무역풍을 타고 대서양과 희망봉을 지나가기 위함이었다.
4월 22일 카브랄 함대는 높고 커다란 산언덕이 있는 육지를 발견했다. 이날이 부활절이었기 때문에 이 산을 부활절을 의미하는 파스콜이라고 불렀다. 이틀 후 카브랄 함대는 포르토 세구로 항구에 도착했다. 카브랄을 따라갔던 한 서기관은 이 항구에서 머문 일주일 동안의 경험을 살려 포르투갈 여행기 문학사상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페로 바즈 드 카르미나의 편지'를 썼다. 함대원들은 이 항구 주변을 탐사하고 현지 원주민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이후 동방으로 가는 선박들은 대부분 이 대륙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스페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카브랄은 당시 이 지역을 베라크루즈라고 명명했으나 현재는 브라질이라는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브라질은 원래 나무 종류 중 하나인데, 이 나무는 가운데 부분이 진홍색으로 되어 있어 염료로 이용되었다. 또한 매우 튼튼하기 때문에 가구를 만들기에도 아주 좋았다. 이 나무 이름이 곧 이 지역 이름이 된 것이다. 브라질목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브라질에서 무역 거래한 최초의 상품이기도 했다.
1501년 포르투갈인들은 함대를 조직해 브라질 해안을 탐사했다. 그리고 일 년 후 브라질목 무역을 페르난도라는 가톨릭교도에게 위탁했다. 페르난도는 매년 6척의 배로 함대를 조직해 브라질 해안선을 따라 탐사를 진행하면서 적당한 곳에 상관을 설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포르투갈의 브라질 최초 거점은 이렇게 세워지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당시 화물 거래 주문서를 보면 브라질목 5,000그루, 노예 몇 명, 원숭이, 앵무새 등이 배에 실렸다.
1530년대 이전에 포르투갈은 브라질 해안을 지키기 위해 소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브라질이 다른 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곳은 수시로 프랑스 해적들의 습격을 받았다. 이곳에서 포르투갈 함대가 탈취한 프랑스 선박에는 브라질목과 노예는 물론이고 표범 가죽 3,000여 개와 1만 8,000근이 넘는 면화가 실려 있었다. 수년간 이곳은 포르투갈이 인도로 파견한 상선과 군함만이 기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브라질의 성장
1530년 마르틴 아폰소 드 소자가 이끄는 함대가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 해에 상비센테가 건설되었다. 상비센테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처음으로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만든 식민 정착촌이다. 정착민들은 이곳의 기름진 땅에 사탕수수를 심고 근처에 사탕수수 공장도 세웠다. 그 후 포르투갈인 리마리오가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내륙 지역에 페르남부쿠라는 소도시를 세웠다. 이후 이곳은 오늘날의 상파울루시로 발전한다. 상파울루라는 지명은 1548년 브라질 초대 총독 토메 지 소자를 따라온 예수교회 목사 마누엘 다 노리브가 페르남부쿠 지역에 세운 상파울루 수도원에서 따왔다.
포르투갈이 동방 무역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것에 비하면 브라질 개척은 아주 조용했다. 하지만 브라질은 분명히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었다. 다만 다른 유럽 열강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1534년 주앙 3세는 브라질 전체를 15개 봉토로 나누어 귀족들에게 하사했다. 봉토를 받은 사람은 자기 영지에 이민과 개척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이 정책의 영향으로 브라질 남부 상비센테와 북부 페르남부쿠가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548년 포르투갈 이민자들은 16개 정착 도시를 건립했다. 이민자 대부분은 포르투갈 본국과 브라질목, 설탕, 면화, 담배 무역을 진행했다. 이렇게 브라질의 경제적 가치가 올라가면서 포르투갈은 이곳에 총독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토메 지 소자가 이주민 1,000여 명을 이끌고 브라질에 도착했다. 소자는 북부 산살바도르에 총독부를 설치했고, 이 도시는 이후 급속도로 성장했다.
당시 브라질 원주민은 주로 밀림에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체계적인 경제 체제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포르투갈이 인도의 완벽한 무역 시스템에 합류한 것과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다. 브라질에 온 포르투갈 이민자들은 이곳의 자원을 활용해 자신들만의 새로운 조직과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다. 브라질은 산림자원이 매우 풍부했는데, 브라질목을 수출하려면 일단 내륙에서 벌목해서 그것을 해안으로 운반하고 다시 선적해야 했다. 이러한 생산 시스템은 최초의 기업을 탄생시켰다.
제2의 고향 브라질
가장 먼저 브라질에 온 포르투갈 이민자들은 대부분 포르투갈에서 종교적 탄압에 시달리던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종교적 탄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브라질로 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 때문에 유대인들은 단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이 현지 브라질 여인과 결혼해 마멜루쿠라는 혼혈 인종을 탄생시켰고, 오늘날 브라질을 다양한 혼혈 사회로 만들었다. 이들은 포르투갈 경제, 문화, 언어를 브라질에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브라질 기업가는 대부분이 설탕 공장 사장이었다. 브라질은 고온다습해 사탕수수 생장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프리카 기니 해안의 포르투갈인들과 연계해 아프리카로부터 수많은 흑인 노예를 수입했다. 흑인 노예들은 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만드는 공장 노동에 투입되었다. 당시 브라질의 설탕 공장은 가정과 사회 경제의 중심이었으며, 포르투갈 이민자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매개체였다.
1584년 예수회 신부 페르난도는 리스본보다 화려한 브라질 북부 대도시 페르남부쿠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한 10명의 설탕 공장 사장들은 돌아가면서 한 번씩 파티를 열었고, 이들이 매년 소비하는 포도주의 양도 엄청났다. 페르난도 신부는 이들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려하게 치장한 귀부인들은 의기양양하다 못해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하느님을 신봉하지도, 미사를 올리지도 않았으며, 설교를 들으려 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다."
1583년 브라질에 정착한 백인은 2만 5,000명에 달했다. 당시 많은 포르투갈 사람이 인도에 가는 목적은 큰돈을 벌어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브라질은 달랐다. 브라질에 온 포르투갈 이민자들은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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