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로의 금과 은을 한 방 가득 채우라는 명령이 있고 5개월간 잉카 제국의 온갖 아름다운 금은 장식품이 카하마르카 성으로 운반되기 시작했다. 피사로는 이 장식품의 예술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성안에 단야로를 만들어놓고 각지에서 운반해 온 금을 녹여 금괴로 만든 후 공평하게 분배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와의 약속을 피사로는 지키지 않았다. 당시 상황이 아타우알파의 죽음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이즈음 일부 잉카 원주민들이 스페인을 공격해 국왕을 구해낼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국왕이 이미 밀지를 내려 반란을 일으킨 동생 우아스카르를 죽이라고 했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이에 피사로와 스페인 군대는 결국 아타우알파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에게 화형과 가톨릭 세례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아타우알파는 세례를 선택했다. 당시 잉카 종교에서는 불에 타죽으면 영혼이 소멸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533년 7월 26일 피사로는 국왕을 교수형에 처했다.
곧이어 피사로는 1,20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거쳐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공격했다. 잉카 제국은 험준한 산속에 수백 년간 요새를 세워 놓았다. 쿠스코에 도착한 후 피사로 일행은 몇 차례 아타우알파를 따르는 군대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 동시에 우아스카르 군대의 도움도 받았다. 피사로는 쿠스코를 점령한 후 또 다른 왕자 망카를 꼭두각시 왕으로 앉혔다.
피사로는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했지만, 이 좁고 기다란 영토를 다스리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그는 1535년 해안 도시 리마를 수도로 정했다. 이곳은 훗날 페루의 수도가 된다. 스페인 병사들의 잔혹한 약탈과 폭행은 꼭두각시 왕 망카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망카는 스페인의 감시 속에서 몰래 10만 대군을 모아 쿠스코 성으로 진격했다. 당시 쿠스코 성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피사로의 동생 곤살로였다.
반년 후 망카가 다시 쿠스코 성을 공격할 당시 알마그로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알마그로와 피사로는 이미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쿠스코 성을 접수한 알마그로는 곤살로를 감옥에 가두었다. 알마그로는 스스로 쿠스코 성의 총독이 되어 피사로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538년 4월 26일 곤살로가 알마그로와 싸워 다시 쿠스코성을 되찾고 알마그로를 교수형에 처했다. 이로 인해 후에 피사로 형제는 큰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곤살로는 잉카 정복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돌아갔으나 곧 체포되었다. 알마그로의 측근이 그를 법원에 고발했고, 곤살로는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피사로 또한 의혹 속에 삶을 마감했다. 그는 1541년 6월 26일 총독부 파티 도중 갑자기 들이닥친 20명의 복면 자객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곧이어 스페인 국왕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식민지 최고 권력기구인 서인도 사무국을 개설해 아메리카 식민지 지배를 담당케 했다. 이 사무국은 각 식민지 영토에 총독과 각 행정기관원, 법관, 세금징수원 등 관리를 파견했다. 신 스페인 영토 내 멕시코성에 사무국 분소를 세우고 신 스페인 지역을 관할하도록 했다. 신 카스티야는 리마 총독부가 관할했다.
스페인은 멕시코에서 대규모 은광을 발견했다. 1545년 신 카스티야 지역의 포토시에서도 은광이 발견되었는데, 1만 8,000톤이 넘는 은이 채굴되었다. 원주민들은 은광 채굴작업에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낙타를 이용해 산 아래로 은을 운반하고 분쇄했다. 이즈음 수은을 이용해 사금을 채취하는 기술이 발명되어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은광은 100년 후 거의 바닥을 드러내었다. 황금에 대한 환상은 수많은 스페인 사람들을 아메리카로 끌어들였고 아메리카 이민자는 하루가 다르게 급증했다. 16세기 중반 신대륙에 정착한 스페인 사람은 대략 10만 명 정도였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메리카에 상륙한 이후 수천 년간 이곳에서 폐쇄적인 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재앙이 늘어났다. 천연두, 홍역 등 유럽인에게 익숙한 전염병이 면역성이 거의 없던 원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1570년 멕시코 지역의 인구는 2,500만 명에서 265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페루 인구는 900만 명에서 13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16세기 중반 스페인은 아메리카 신 스페인과 오늘날의 볼리비아에서 대규모 은광을 발견했다. 1502년부터 1660년까지 스페인이 아메리카로부터 채취한 은은 1만 8,600톤, 황금은 200톤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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