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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31_찰스 1세의 죽음 이후의 영국과 크롬웰

by 티제이닷컴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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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 처형 이후의 영국

 찰스 1세의 머리가 땅에 떨어진 후,  한 소년이 그의 머리를 집어 들며 소리쳤다. "보세요! 반역자의 머리예요!" 이 장면을 목격한 어느 성직자는 비통함과 회한으로 가득 찬 글을 남겼다. "소년은 국왕의 존귀한 머리를 마귀의 머리처럼 집어 올렸다. 관중은 미친 듯이 아우성을 질러댔다. 마치 지옥에 온 것 같았다. "

 국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 영국에 퍼지자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크롬웰 경이 군대를 장악한 뒤 의회를 압박하여 저지른 국왕 처형 사건은 민심을 잡진 못했다.

 로렌스 에카드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부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른 것은 그들이 끝까지 국왕과 맞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국왕의 머리를 높이 쳐들자 군중 속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래지 않아 왕당파들과 장로회 목사들이 항의의 물결을 일으켰다. 국민들 사이에서도 공포와 죄책감이 널리 퍼져 나갔다."

 그는 또 "국왕의 처형 소식이 전 영국에 전해졌을 때, 수많은 임산부가 아이를 유산하고 말았다. 극도의 충격으로 인해 몸져누운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부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다 정신을 잃었고, 놀란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급사한 사람들도 있었다."라고 적었다.

 어느 영국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시 영국에서 벌어진 상황은 숲속의 노루 떼가 호랑이를 잡아 죽인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 시대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뛰어넘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지요." 이 소식은 유럽 대륙에까지 전해져 각국의 왕실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때는 영국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기였다.

 찰스 1세의 비극적인 죽음은 아마도 그가 왕권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귀족과 신민의 권리를 무시한 결과, 그는 국왕의 자리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도 보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영국 국민들의 책임도 없지 않았다. 충분히 성숙한 정치의식 없이 혁명을 일으켰기에 이렇게 전무후무한 파란을 몰고 왔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영국 국민은 자신들의 과오를 재빨리 뉘우쳤다. 그 덕택에 현대 정치 문명의 보편적인 규범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치투쟁 중에 가능한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고, 혁명에서도 가능하면 피를 흘리지 않는 편을 택했다. 유사 이래로 각 계층 간의 갈등은 끊임없이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대가로 하는 폭력적인 혁명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에 가장 비경제적인 방법이다. 폭력적인 해결은 사회를 정체시키거나 후퇴시킬 뿐이다.

 이런 비경제적인 방법을 피하기 위해 어느 한쪽만 노력해서는 안 된다. 서로가 타협하는 자세로 한 발씩 양보하고 대화해야 한다. 피비린내 나는 분쟁은 서로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 정신은 회색지대에서의 타협이다. 이후 영국 역사에서는 이 회색빛 타협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전제정치에서 벗어난 결과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또 다른 전제정치의 시작일 따름이다.


의회파와 크롬웰이 정권을 잡다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잉글랜드에는 공화국이 세워졌다. 국가 행정권은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수장을 맡은 국무회의에 잠시 맡겨졌다. 하지만 국왕을 옹호하는 세력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크롬웰이 찰스 1세를 '반역죄'로 단두대에 세운 지 1주일 만에 스코틀랜드 의회는 찰스 1세의 아들을 새로운 국왕인 찰스 2세(1630~1685)로 옹립하겠다고 선포하고 잉글랜드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크롬웰이 한발 앞섰다. 그는 아일랜드 왕당파의 위협을 물리친 후, 곧바로 군대를 스코틀랜드로 이동시켰다. 크롬웰의 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진입하여 스코틀랜드 군을 격파했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 장로파와 손잡고 잉글랜드로 진격했다가 우스터에서 크롬웰 군대에 패배한 뒤 망명객 신세로 숨어 다니다가 프랑스로 탈출했다.

 1653년, 내전은 왕당파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국왕의 유령마저 물러난 마당이었지만 의회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없었다. 또 다른 시련이 눈앞에 닥쳐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롬웰 동상
크롬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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