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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48_산업혁명이 태동하는 영국의 상황

by 티제이닷컴 2024.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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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산업혁명은 방직기로 시작하였는가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 삼으면서 오히려 목화 산지인 인도에 거대한 시장을 제공한 꼴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 대중들 사이에서 인도에서 수입한 우수한 면직물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영국 내 면직물 소비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영국의 방직업은 모직물 중심이었기 때문에 인도의 수공 면방직과 근본적으로 경쟁이 되지 않는 면직물은 거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그 당시 영국은 자유무역 정신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1700년, 중상주의를 기본 국책으로 표방하던 영국 의회는 방직 업체들의 거센 압력을 받아 인도산 면직물인 캘리코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킨 데 이어 이를 판매하는 것도 금지했다. 하지만 식민지에 불과했던 인도는 영국의 이러한 보호무역 조치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인도의 면직물을 추방하고 나자 영국의 방직 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이미 면직물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거대해진 국내시장의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실을 뽑아 직조하는 속도를 더욱 증대시켜야 했다. 하지만 당시 방직공장에서 사용하는 장비는 로마 시대부터 사용해 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블랙홀처럼 생산품을 빨아들이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영국의 방직공장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산업혁명의 태동

 왕성한 시장의 요구 속에서 산업혁명은 태동하고 있었다. 생산 속도를 증가시키기 위해 공장들은 온갖 지혜를 짜내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생산력은 점점 향상되었다.

 이렇듯 방직업 분야의 혁신을 통해 영국은 산업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여기에 7년 전쟁의 포성이 산업혁명을 일깨우는 신호탄을 작렬시킨 셈이었다. 이후부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각종 신기술과 기계 발명의 '혁명기'가 시작된다.

 1733년, 영국의 방직기사인 존 케이가 '플라잉 셔틀'을 발명했다. 이 플라잉 셔틀은 모든 방직 공정을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든 획기적인 장치였다. 1767년, 목수였던 제임스 하그리브스는 다축방적기를 발명하고 딸의 이름을 붙여 '제니 방적기'라고 이름 지었다. 기술의 급진전에도 불구하고 제니 방적기는 아직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

 1771년,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처음으로 수력을 동력으로 하는 수력방적기를 발명하여 방적공장을 세웠다. 1779년에 이르자 이 공장은 천여 대의 방추기와 300명에 이르는 직공들을 거느린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아크라이트는 이와 같은 조직 형태의 공장을 설립하여 근대 공장의 전형을 제시했다.

 1779년에는 소년 직공 출신의 방직 기사 새뮤얼 크럼프턴이 '뮬' 방적기를 발명했다. 이 기계는 제니 방적기와 수력방적기의 장점만을 혼합해 만든 것으로, 뮬로 만든 면사는 훨씬 부드럽고 튼튼했다. 기록에 의하면, 가내 수공업에서 기계공업 단계로 접어들게 된 면방직 산업의 기술혁신으로 1800년까지 영국 전역에 600개의 뮬 공장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산업혁명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

 이렇게 면방직 산업은 가장 먼저 기계화를 실현해 나갔다. 기계를 사용하게 되면서 생산이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수공업 공장의 생산 효율도 크게 제고되었다. 그 결과, 현대적인 공장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이 공장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강이나 하천을 끼고 있는 지역에 세워졌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18세기 초까지 기계의 동력원은 수력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기계들 역시 선조들이 200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물의 힘을 빌어야 작동할 수 있었다.

 동력원을 구하는 데 제약이 따르면서 생산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는 동력 기계를 발명하는 국가가 경쟁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즉, 새로운 동력원의 발견이 한 국가와 민족이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열쇠가 되었다.

 그레이트브리튼의 3대 도시 중 하나인 글래스고는 '산업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오트(1736~1819)가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산업화를 실현한 본거지이다. 1736년, 와트는 글래스고 부근의 소도시 그리녹에서 태어났다. 그리녹에는 지금도 유명한 제임스 와트 선술집이 남아 있다. 와트는 글래스고 대학의 기계 수리공으로 일하면서 구내에 작업장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기계 제작에 착수했다.

제임스 와트
산업혁명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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