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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59_대영제국의 황금기, 빅토리아 시대를 맞이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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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와 자유무역주의

 애덤 스미스는 무역과 전문인력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의 이론을 통해서 합리적인 분업으로 생산성을 높일 것을 주창했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그는 개인의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보다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장 전체의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스미스는 시장의 인위적인 조작과 독점행위에 반대했다. 가장 효율적인 상업활동을 위해서는 시장에서의 자연스러운 거래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산업혁명 전의 완만하게 발전하는 사회에서는 그의 주장이 아주 잘 들어맞았다. 시장의 힘에 따라 점차 무역을 늘려가는 것이 바람직한 발전 방향이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 역시 애덤 스미스와 유사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당시 매우 획기적인 비교우위론을 펼쳤다. 비교우위론이란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는 이론이다. 이를 통해 중상주의를 대체할 신경제 이론의 기초가 다져졌다. 1846년, 영국은 이 이론에 근거해 '곡물법'을 폐지하고 자유무역을 선언했다.

 경제 자유화로 인해 고소득계층도 출현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혁신과 자본의 합리적 분배에도 크게 기여하게 된다.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가 제시한 이론은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국민들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영국은 이미 산업 부문에서 절대적인 경쟁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즉, 세계의 공장이 된 영국은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고, 바로 그 상태에서 자유무역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영국의 면방직과 같은 수출 주력 산업은 후에 엄청난 특수를 누리게 된다.


대영제국의 황금기, 빅토리아 시대

 1837년 6월 20일, 18세 소녀가 휘황찬란한 마차를 타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소녀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다. 소녀는 자신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성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녀의 큰아버지였던 윌리엄 4세가 죽자 왕관은 세상 물정 모르던 이 어린 소녀에게 맡겨졌다.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을 64년간 재위했다. 이는 엘리자베스 2세(70년 재임) 다음으로 가장 긴 재위 기간이다. 18세에서 82세까지 그녀의 삶은 대영제국의 찬란한 영광과 함께 완성됐으며, 영국이라는 동반자와 함께 19세기를 헤쳐 나갔다.

 국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녀의 답은 '국왕은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였다. 그녀는 일찍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9명의 자식을 길러냈다. 아이들이 유럽의 각 왕실과 결혼하면서 그 자손들에게 '유럽의 할머니'라고 불렸던 빅토리아 여왕은 국가를 위해 아무 일에도 나서지 않았다. 여왕은 항상 왕족으로서 위엄을 지키며 국민들이 평안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오늘날까지도 영국인이 그리워하는 '빅토리아 시대'를 연 것도 바로 그녀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한 64년간은 영국이 최고로 강성했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시대였다. 그녀가 죽고 나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영국은 '에드워드 시대'로 분류된다.

 1819년 5월 24일, 여왕은 런던의 켄싱턴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런던에서 아이를 낳기 위해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영국으로 갔다. 아버지 켄트 공작은 딸의 탄생을 무척 기뻐했다. 대영제국의 왕위를 물려받을지 모르는 딸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어머니 쪽 측근들의 농간이 있었지만 비교적 현명하게 시련을 견디며 유년 시절을 보낸 빅토리아는 세계 최강대국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정치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멜버른 경은 여왕의 시중을 드는 하녀 둘을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 이유는 하녀의 남편들이 이전 정부에 충성했던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젊은 여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난 하녀들을 바꿀 생각이 없답니다. 그 애들의 정치적 관점 따위는 내게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하녀들과 정치토론을 할 일은 없으니까요."

 빅토리아 여왕은 여왕의 의무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는 헌법을 개정하거나 국왕의 권력을 확대하려는 등의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이는 여왕이 '허수아비 국왕'이어서가 아니라 이런 일들은 정부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결코 내각 의원들이 여왕에게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권력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부에 내린 조서에 '만약 정부가 국왕의 권력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대신들은 파면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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