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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10_구미 사절단 파견과 메이지 신정권 등장

by 티제이닷컴 2023.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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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쿠라 사절단의 구미 시찰 중 프로이센에서 러시아로 향하는 기차에서 기도 다카요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국가마다 크기도 문화도 다르지만, 국가의 흥망성쇠는 오로지 해당 국가의 법과 제도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구미사절단 파견

 1871년 12월 23일 일본 요코하마항, 4,500톤짜리 미국 상선 아메리카호가 천천히 항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항구에는 일본의 구미 사절단을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이 있었으며, 아메리카호에는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있는 구미 사절단 단원들이 인사하고 있었다. 이 배는 요코하마에서 출항하여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를 향했다.

 

오늘날 요코하마항 전경
구미 사절단이 출항한 요코하마항의 오늘날 모습. 출처 : 위키백과 '요코하마항'


 이는 일본 그 후 일본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꿀 항해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절단은 유럽과 미국을 2년에 걸쳐 둘러본다. 2년이란 시간에 불과한 이 파견의 결과는 일본을 넘어 아시아,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운명을 바꾸었다.

 이 사절단은 총 48명으로 그중에는 메이지 신정부의 몇몇 고위 관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사는 우대신인 이와쿠라 도모미, 부사는 대장경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참의인 기도 다카요시, 공부대보인 이토 히로부미, 외무소보인 야마구치 나오요시였다. 이 밖에도 이 배에는 58명의 유학생도 타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5명은 일본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었다.

 사절단의 임무는 11월에 벌써 정해져 있었다. 첫째, 구미 각국과의 우호를 도모할 것. 둘째, 조약 수정을 핑계로 각국 정부에 일본 정부의 목적과 구상을 천명할 것. 셋째, 제도, 법률, 경제, 회계, 교육 등 각 분야를 시찰하고, 이들 제도와 규칙을 일본에 도입하는 것에 대한 적합성 여부를 따질 것. 이 세 가지가 우선적 사항이었다.

 영국 유학 경험이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하면 모두 외국은 처음 나가보는 것이었다. 48세였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갑판에 올라가 파도가 넘실거리는 태평양을 바라보며 지난 3년간 불어닥친 일본의 유신 정국을 떠올렸다.

신정권의 확립

 신정권은 정변과 전쟁 속에서 탄생했다. 1868년 1월 3일, 즉 도막 밀서가 발표되던 그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총재, 의정, 참여 3직이 설치되었는데, 이 가운데 제대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그리고 이노우에 가오루 등 참의였다.

 신정권은 도막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확립되어 안정기로 들어섰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 이 두 명의 정치가 앞에 놓인 가장 큰 난제는 전통적인 통치자로서 천황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물론, 진정한 통치 군주로 만들어 절대 권력을 지니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지도자들은 이미 천황을 '손안의 보물'로 여겼다. 그들은 왕정복고 이후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사람은 16살밖에 안 됐던 메이지 천황이 아니라, 자신들이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울 일본을 위해 새로운 정치 제도를 찾아야 했다. 천황은 대내적으로는 열번동맹의 중심이고 대외적으로는 국가를 대표했다. 과거 막부의 쇼군이 '다이쿤'의 명의로 체결하던 조약을 이제는 모두 천황의 명의로 확인하고 체결했다.

 1868년 2월 8일, 천황은 각국에 '개국조유'를 발표해, 만국과 대치하겠다는 목표를 명확하게 밝혔다. 이는 이후 일본 대외정책의 기조가 되었다. 여기서 '대치'를 기도 다카요시는 '각국과의 병립'으로 이해하고, 오쿠보 도시미치는 '만국과의 대립'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와쿠라 도모미는 가장 극단적 입장으로 '해외 만국은 모두 우리 황국 공공의 적'이라 인식했다. 한편, 일본은 조유에 만국공법(국제법)을 인정한다고 밝혀, 서유럽 각국을 경계함과 동시에 만국공법을 약소국이 강권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천황이 만국과 대치하는 일본을 이끌어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68년 4월 6일, 교토 황궁의 시신덴에서 어린 천황이 도막파의 주도로 구게와 제후, 신하들을 소집해 신정부의 시정 강령인 '5개 조 서문'을 반포했다. 다음이 그것의 내용이다.

첫째, 모든 사안은 널리 회의를 열어 공론에 따라 결정한다
둘째, 상하가 합심하여 경륜을 지속적으로 펴 나라를 번창하게 한다.
셋째, 관과 무는 물론 아래로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그 뜻을 수렴하여 언제나 민심을 헤아리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다.
넷째, 누습을 타파하여 천하의 공도를 세운다.
다섯째, 지식을 세계에 널리 구하고 황실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이를 번창하게 한다.

 이어 천황은 '일본에서 단 한 번도 실시된 적이 없는 변혁을 지금 실시할 것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같은 날, 천황은 친서를 발표해 직접 천하를 다스릴 걸 천명하기도 했다.

 3년 동안 신정부는 수많은 압력에 직면했다. 우선 전국 통일을 실현하는 문제가 가장 큰 난관이었다. 신정부는 도쿠가와가의 영지를 회수했으며, 8부 12현을 설치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천황의 권위를 세우고자 천황으로 하여금 오사카를 순행하도록 하고, 천황의 정신적인 권위를 이용해 전국 통일을 준비했다. 천황이 순행을 하자, 각 지역도 중립적인 입장은 내려놓고, 신정권이 일본의 유일한 정부임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흐름이 바뀌었다.

 하코다테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며, 도막 전쟁은 끝났지만, 전국의 번들이 각자 대군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체제 자체를 바꾸는 데 한계가 있었다. 중앙 집권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는 '판적봉환'의 개념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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