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4월, 교토의 사쓰마번 관저에서는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와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담판을 시작했다. 도사 번의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의 물밑 작업에 힘입어 강력한 두 개의 번이 서로 손을 잡은 것이다. 이 담판에서 사쓰마번은 조슈번에 위기가 닥칠 경우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막부는 조슈번을 겨냥한 제2차 조슈 정벌을 일으켰다. 막부와 조슈번, 두 세력의 뒤에는 각각 프랑스와 영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2차 조슈 정벌
7월 18일, 막부가 제2차 조슈 정벌을 시작했으나, 사쓰마번은 약속을 깨고 출병을 거부했다. 다른 30개 번이 네 방향에서 조슈에 협공을 펼쳐, 조슈는 본거지인 오시마를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조슈번은 다카스기 신사쿠가 직접 전선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하고, 23일 해상에 정박 중이던 4척의 박구 군함까지 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둔다. 첫 번째 전투의 승전보가 전해지자 조슈 군대 전체에 사기가 높아졌다. 그 후 이노우에 가오루가 군대를 이끌고 막부의 주력군을 궤멸시키고, 오무라 마스지로는 하마다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다카스기 신사쿠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고쿠라를 점령하자, 막부군은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할 수 없었다. 고쿠라가 조슈 군대에 점령당했을 때, 때마침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한다. 그러자 막부 군대는 '쇼군의 장례'를 핑계로 퇴각하였다. 결국 제2차 조슈 정벌도 막부의 실패로 마무리됐다.
왕정복고 시대 : 도막파의 왕정복고 vs 쇼군의 대정봉환
1867년 1월 30일, 고메이 천황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해 2월 13일, 어린 무쓰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했다. 공무 합체에 찬성하던 고메이 천황의 죽음으로 도막 운동의 큰 걸림돌은 제거되었다.
1867년 8월, 나고야의 이세 신궁에 풍년을 상징하는 부적을 줍는 사람에게 행운이 온다는 천강신부의 날이 찾아왔다. 저마다 화려한 의복을 입은 남자들이 여장했다. 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부잣집에 몰려가 술상을 내오라며 떼를 썼다. 또한 부자들에게 돈을 받아 길 가는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날은 누구나 웃고 떠들며 술에 취해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유독 그해에는 전국적으로 사람들의 방종이 잦았다. 막부와 각 번이 아무리 금지해도 그 수는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이듬해 봄에는 막부의 군대와 경찰 기관이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져버렸다.
1867년 11월 1일, 오쿠보 도시미치와 조슈번의 번주 시나가와 야지로, 구게 이와쿠라 도모미는 교토에서 비밀리에 왕정복고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이틀 후에는 도막파가 각 번의 병력을 모아 연합군을 결성하고, 조정에 도막 밀서를 발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8일, 이와쿠라 도모미의 노력으로 조정은 조슈 번주의 관직을 회복해주었고, 조정으로 복귀하도록 명하였으며,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도막 밀서를 보냈다.
그러나 밀서가 전달된 그날,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대정봉환(막부가 천황에게 국가의 통치권을 반환한 일)을 제의했다. 도막파의 힘이 더 커지기 전에, 미리 막부측에서 선수를 치겠다는 셈이었다. 도막파의 명분은 없애고, 자신은 새로운 정치 체제를 통해 실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과연 이튿날 쇼군은 천황으로부터 칙서를 받았다. 칙서의 주요 내용은 최고 권력을 회복한 천황이 제후 회의를 열어 모든 정무를 결정하며 제후 회의를 개최할 때까지는 쇼군이 영지를 통치한다는 것이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도막파는 '천황'이라는 '보물'을 단단히 보호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에도 막부의 관리들이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후 회의가 되면 막부의 세력이 더욱 커져 몰락시키기가 어려워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막부는 이미 교토와 오사카에서 군대를 소집해 놨기 때문에,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교토를 향해 병력을 증강했다. 심지어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부 구게들에게는 호신용 권총까지 지급했을 정도였다.
1868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지을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와쿠라 도모미 등 5개 번의 번사들은 회의를 개최했다. 1월 3일을 결전의 날로 정했다. 이날 왕정복고를 위해 궁정 정변을 일으켜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끌어내리면서 정권을 무력으로 빼앗기로 결정한 것이다. 전날인 1월 2일,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왕정복고에 대한 건의서'를 보냈다.
3일 새벽, 조정은 천황의 명의로 도쿠가와가의 친번인 아이즈와 구와나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병사들이 궁정 수호 직무를 취소하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지휘하에 5개 번의 병력이 황궁 수호를 명목으로 조정을 보호하게끔 했다. 그리고 왕정복고 정변이 시작되자, '왕정복고대호령'을 발표해 조정의 셋쇼(천황을 대신하여 정무를 담당)와 간파쿠(왕을 보좌하는 자리였지만 규정엔 없는 관직) 제도를 폐지하고, 막부가 있던 세이타이쇼군(흔히 말하는 쇼군)이라는 관직도 없애버렸다. 왕정복고는 진무 천황이 초대 천황제를 수립한 때로 복귀하자는 것이므로 이 세 가지 제도를 폐지하고 임시로 총재, 의정, 참여 3개 관직을 두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천황 정부였다.
그날 밤, 고고쇼(황궁에서 황실과 막부 관리들이 회견하던 장소)에서 첫 번째 정부 3직 회의가 개최되었다. 토론의 주요 의제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관직을 취소하며, 영지 400만 석 중의 200만 석을 조정에 귀속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을 260여년간 통치해 온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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