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복고 정변으로 인해 조정을 차지한 도막파와 막부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제 그들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대화 수단이 되었다. 이튿날 교토 서부의 니조 성에 머물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관직을 취소한다는 어지를 받았다.
보신전쟁(1868~1969)
전날 새벽부터 그의 친번 위병들도 조정에서 모두 철수당했으며,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그는 정변을 일으켜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정변 준비에 착수한다. 당시 그의 수중에는 1만 군대가 있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은 술렁이고 장정들은 갑옷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후다이 다이묘들이 성 밖을 지키고, 성안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어지를 전하러 온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츠와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에게 어지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6일 저녁 6시, 니조 성을 출발한 요시노부는 7일에 오사카에 도착했다.
요시노부는 오사카에서 프랑스 공사를 만나 일본을 대표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쇼군인 자기 자신이며,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정부는 '어린 천황을 내세워 사심 채우기에 급급하다'며 비난했다.
이때, 오쿠보 도시미치는 데라시마 무네노리를 시켜 천황 명의의 조서를 작성하고, 조정은 외국에 새로운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에도에서는 막부의 관리와 동북 지역 각 번의 다이묘들이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할 것을 역설하고, 주전파들이 대외 확장 및 군비 확충을 적극 주장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에도 성 내의 사쓰마번 관저에 화재가 발생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누군가를 매수해 방화한 것이다. 막부로 하여금 전쟁을 도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오사카에서 외국과 체결한 조약을 준수할 것을 약속하는 한편, 조정에 무력으로 사쓰마번을 토벌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1868년 1월 26일, 막부 군함이 효고 앞바다에서 사쓰마번의 선박에 포격을 가하면서 드디어 '보신 전쟁'이 발발했다. 그날 막부 군대는 오사카에서 북상해 교토로 진격했다. 막부는 기세등등한 1만 5,000명의 군을 앞세워 전투에 나섰고, 도막파 병력은 5,000명에 불과했지만 훈련된 정예 부대인 데다가 최신 무기로 무장까지 하고 있었다.
1월 27일 저녁 무렵, 교토 부근의 도바와 후시미 일대를 지키고 있던 사쓰마 군대가 막부 군대에 포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조정은 이미 당초 계획대로 천황의 친정을 준비하고, 비밀리에 19살의 구게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천황이 출정할 때 호위할 것을 지시했다. 3일 후, 도막 파 군대가 막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에 패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급히 오사카에서 본거지인 에도로 피신했다.
3월, 도막파 군대는 동정군을 조직하여 곧장 에도로 진격했다. 당초 4월 7일에 에도 성을 공격할 계획이 있었지만, 사이고 다카모리와 막부의 군대 총감이었던 가쓰 가이슈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목숨을 보장해 주는 대신 에도성을 점령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1868년 5월 3일,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항복하고 에도성을 내주어야만 했다. 신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삭탈관직하고 미토로 귀양 보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검은 무명 윗옷과 흰색 줄무늬 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은 채, 넋이 나간 모습으로 우에노의 간에이지(에도 불교의 중심 사찰)를 떠났다. 그러자 수십 명의 호위 무사들도 눈물을 흘리며 요시노부를 따라 미토로 떠났다.
이 전쟁으로 일본이 통일된 후인 1603년, 도쿠가스 이에야스부터 시작된 에도 막부의 통치 시대가 260여년 만에 막을 내렸다. 새로운 정부는 그 후 1년간 노력한 끝에, 막부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일본은 근대화를 향한 메이지 유신 시기로 차츰 접어들게 된다.
1868년 10월 23일에는 신정부의 천황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연호를 메이지로 고쳐 1세 1원제를 확립했다. 11월 26일, 천황은 에도에 도착해 에도를 '도쿄'로 개명했으며, 1869년 4월 5일, 도쿄로 도읍을 옮겼다.
왜 도막 운동의 주요 세력은 하급 무사계급이었을까?
봉록을 받는 고급 무사들은 당연히 현상 유지를 원할 것이다. 반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하급 무사들은 불만을 품으며 막부를 타도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렸다.
페리가 처음 상륙했을 때만 해도 막부 내부에 중추적인 인물과 영향력 있는 다이묘들이 있었지만,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대립하고 하급 무사들이 도막 운동에 참여하면서 권력이 점차 아래로 이동했다. 당시 고급 무사들은 굳이 도막 운동에 참여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하급 무사들은 잃을 게 없었기에 정치에 직접 개입해 막부를 타도하려 한 것이다.
도막 운동은 사쓰마번의 내부적인 변화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파 인사들이 정부의 요직에 대거 임명되고, 사쓰마번 세력은 오랫동안 권좌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러자 사쓰마번은 천황과 도쿠가와 막부 사이의 모순을 이용해,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점점 확대하기를 꾀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바로 사쓰마번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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