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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38_조선, 중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는 일본

by 티제이닷컴 2024.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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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9년 3월, 일본은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이름 바꾸고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다. 6월에는 류큐 국왕 쇼타이와 왕실 구성원들을 도쿄로 압송해 류큐 왕국을 정식으로 합병했다. 이제 다음 목표는 조선이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욕


 이후 일본은 북상과 남진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래서 북으로는 조선을 손에 넣고, 만주와 몽골을 침략한 후엔 중국 전역으로까지 손을 뻗친다. 남으로는 타이완을 점령한 후 동남아에 진출한다. 이 둘 중에서 일본은 북상에 더욱 주력해 훗날 대륙 정책까지 수립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전략은 이미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차근차근 실시된 것이었다.

 1876년, 일본은 조선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목적은 조선 침략뿐만 아니라, 조선이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최초로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은 이때부터 조선의 대문을 열고 본격적인 침략을 실시했다.

강화도 조약

 개화론자들은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맞서 부국강병을 위해 개화사상을 도입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대외 통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두 12개 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에는 일본의 정치, 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이 조약을 시작으로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도 통상을 시작하게 되었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는 반면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1882년, 서울에서 군사 정변이 일어나 조선 사병이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청나라 역시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를 임오군란이라 한다. 2년 후인 1884년, 일본의 지원을 받은 조선의 개화당이 대신을 살해하고 왕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이 이 사건에 적극 개입하자, 청나라는 위안스카이가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진격해 일본인들을 몰아내도록 하고 조선에 대한 통치를 회복했다.

위안스카이(1859~1916)

 조선의 임오군란, 갑신정변, 중국 무술정변에 관여했다. 의화단 사건 후 총독, 북양 대신이 되었다. 신해혁명 때는 전권을 장악하여 선통제를 퇴위시키고, 1913년에 대총통에 취임하였으며, 1916년에 제위에 오르겠다고 선언하였으나 반대에 부딪혀 실각하였다.


 1884년, 조선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중일 양국의 군대가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치달았다. 당시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중국은 조선 내 긴장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일본도 잠시 청나라와의 대결을 멈추고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략에 주력하였다. 중국이 조선으로 남하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러시아에 대항하도록 유도해 조선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1890년, 내각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제1회 제국의회 시정 보고에서 처음으로 국가의 '주권선(국경선)'과 '이익선(세력권)'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는, '이익선이 조선에 있음'을 명확히 밝혔다.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


일본, 중국을 탐하다

 1880년대부터 일본은 군사적으로 중국을 정탐하기 시작하여 '인방병비략'과 '청조와의 투쟁 방책'을 완성했다. 1887년에는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한 후, '청나라 토벌 책략'을 제출해 5년 이내(1892년 이전)에 모든 준비를 끝낸다. 이때 중국 국토의 일부를 점령해 중국 전체를 분열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892년 7월, 청 북양 수사의 제독 정여창이 군함 정원호와 진원호를 이끌고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정여창은 정원호로 일본 의원을 초대했다. 일본의 법제국 장관 오자키 사부로는 훗날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거포 4대는 직경이 1척에 달해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규모였다. 청의 장군들은 모두 영어를 구사했다. 함께 정원호에 갔던 이들은 도쿄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중국이 대국인 데다가 이미 우수한 함대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은 3~4톤급 순양함 서너 척 밖에 없어 비교되지 않으니 불안하다."라고 이야기했다.

 일본은 북양 수사에 대항할 수 있는 해군을 창설하는 것이 시급했다. 천황이 조서를 발표하자 일본 전체가 동요했다. 많은 사람이 군함 건조를 위한 모금에 참여했다. 그 후 일본 해군은 빠르게 성장하였고 이윽고 북양 수사를 능가하는 속사포를 갖추는데 이르렀다. 반면 청나라의 서태후는 해군 군비로 이화원을 지어 중일 양국의 무기 수준에는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1893년, 참모차장 가와가미 소로쿠가 직접 조선의 부산, 인천, 서울과 중국의 옌타이, 톈진, 난징, 상하이를 방문해 조사한 후 청나라와의 전쟁이 승산 있다고 판단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쟁을 도발할 빌미를 찾는 일이었다. 일본은 국내외 정세를 분석한 후 1894년을 전쟁 개시 시기로 잡았다. 그렇게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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