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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40_일본의 청일전쟁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

by 티제이닷컴 2024.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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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39_청일전쟁 발발. 일본, 조선을 탐내다

구미 각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기 위해 제1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가 무쓰 무네미쓰의 계책을 받아들여 도쿄에 로쿠메이칸(메이지 시대 외국인 접대소)을 건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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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은 이미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고, 일본도 열강의 간섭으로 이미 확보한 이익을 빼앗기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청나라가 장인환과 사오여우롄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히로시마로 보냈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그들이 전권을 위임받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그들을 돌려보내고 이홍장이 직접 협상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다


 1895년 3월, 이홍장이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 외상 무쓰 무네미쓰와 담판을 벌였다. 두 차례 담판에서는 휴전에 관한 내용이 논의되었지만, 세 번째 담판에서는 청나라 조정의 지시를 받은 이홍장이 화의 체결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회유와 위협을 함께 사용하며 협상의 주도권을 잡고 있을 때, 이토 히로부미를 궁지로 몰아넣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의 어떤 한 부랑자가 이홍장 안면에 총격을 가하여 이홍장이 의식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국제 여론의 화살이 집중되었고, 일본 정부는 가장 좋은 협상 파트너를 잃고 협상이 더욱 복잡해질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직접 관리들을 설득해 휴전 및 화의 체결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이홍장에게 화의 조약의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역시 악랄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인정할 것,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팽호를 일본에 할양할 것, 3억 냥의 배상금을 지급할 것, 7개 항구와 양쯔강, 샹강을 개방하고, 일본인들에게 무역 공장 설립과 화폐 사용 특권을 부여할 것 등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무리한 요구에 당황한 이홍장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일본 요구를 전하고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무쓰 무네미쓰는 이미 전보국으로부터 이홍장이 보내는 전보를 파악하여, 청의 전략을 알고 있었다. 협상에서 이홍장은 첫 번째 조건에만 동의하고 그 밖의 조건에 대해서는 일일이 반박했다.

 영토 할양 요구에 대해 이홍장은 문서를 통해 "국가가 소유한 땅은 모두 대대손손 물려받은 것이므로 타국에 할양하면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일본 외상 무쓰 무네미쓰도 이홍장의 주장이 타당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절대로 양보할 생각이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제5차 담판에서 이홍장이 배상금을 낮출 것을 요구하며, "5,000만 냥 낮출 수 없다면 2,000만 냥이라도 어떻소?"라고 물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배상금 삭감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홍장이 타이완을 할양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두 달가량이 걸린다며, "왜 그리 조급한 것이오? 타이완은 이미 일본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요?"라고 묻자, 이토 히로부미는 "아직 삼키지 않아 몹시 배가 고프오!"라며 소리쳤다.

 청나라가 랴오둥반도를 일본에 할양하였는데, 이걸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가만히 지켜볼 리 없었다. 러시아는 일본 고베와 중국 옌타이로 공사를 보냈고, 독일 공사도 일본에 반대 뜻을 전달했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이 나서서 3국 간섭을 저지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외교적인 노력이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영국과 미국이 굳이 구태여 전쟁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두 나라 사이에서 중립을 고수했다. 그 대신 랴오둥반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중국에 3,000만 냥을 추가로 요구했다.

 이러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은 북진과 남진의 교두보를 모두 확보하고, 중국에 공장을 설립할 수 있는 이권을 획득했으며, 영국 등 서구 열강도 최혜국 대우에 따라 어부지리로 청나라에서의 이익을 채갔다.

 청일전쟁 승리는 일본인들의 민족주의 광기에 더 힘을 실었다. 그들은 승전 기쁨에 취해 자신들이 천황의 신민이라는 인식을 다시 한번 확고히 다졌다. 천황에 대한 숭배가 강해질수록, 반대로 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멸시감도 강해져만 갔으며 일본은 무력 침략을 향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 2억 3,000만 냥 가운데 60퍼센트를 육·해군 확충에 쏟아부었다. 중국은 배상금 조달을 위해 국제 은행에서 돈을 빌렸는데,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중국의 배상금을 런던에서 직접 파운드로 받아 금본위제 실시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시모노세키 조약 협상 기간중 쵤영된 청나라 대표 이홍장의 모습
이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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