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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37_일본, 국외 영토를 탐내기 시작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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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 진출해야 한다는 사상은 일본을 군국주의 침략 노선으로 인도했다. 그 후 일본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열강의 후발주자이자 아시아의 돌연변이로서 특유의 야만성과 흉포함으로 수많은 아시아 국가를 침략하였으며,  수천만 아시아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일본의 피비린내 나는 흥성은 인류 역사에 치욕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아시아 국가는 그때 입은 상처가 오늘날까지도 모두 아물지 않아 여전히 일본을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게다가 일본이 지난 역사에 대해 애매하고 잘못된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아시아 국가들과의 사이에 깊이 팬 심리적인 골이 메워지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탈아론


 1885년, 일본 사상계의 아버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신이 운영하는 '시사신보'에 '탈아론'을 발표한다. " 그는 처음으로 일본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우리 일본 국토가 아시아의 동쪽에 있기는 하지만, 국민정신은 이미 고루한 아시아적 정신을 벗어나 서양 문명과 가까워졌다. 중국과 조선이 일본처럼 개혁을 실시하지 않는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멸망하고 말 것이다. 또한 그 국토는 선진국들이 서로 나누어 가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주변 아시아 국가를 개화함으로써 아시아 공동 번영의 날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아시아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가들과 발걸음을 함께 해야 한다. 중국과 조선이 이웃 나라라고 해서 특별 대우해선 안 되며 서양인들이 그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대해야만 한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으로 인해 중국 및 조선과의 관계가 심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한 이 사상은 당시 일본 정부와 많은 일본인들의 생각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서양 각국과 맺은 조약을 수정하여 평등 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서구 열강들을 본보기 삼아 중국과 조선에 불평등 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등 이미 침략을 위한 준비를 했으며, 줄곧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삼고 군비를 확장해 왔다.

 탈아시아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일본인들이 아시아 국가를 멸시하는 근본적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민족주의의 광기

 일본 개국 직후, 요시다 쇼인은 "국력을 기르기 위해 조선과 만주, 중국을 점령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천황 명의로 발표한 서신에서 "1만 리 파도를 개척하여 국가의 위엄을 사방에 널리 알려야 한다."라고 명확하게 밝혔다. 대외 확장은 일본의 국책이었다. 막부 말기에 치토세 마루 호를 타고 상하이에 가서 시찰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청나라를 침략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1871년 일본과 중국이 '청일 수호 조약'과 '통상 장정'을 체결했다. 일본이 제안한 초안은 중국과 프로이센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대표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최종적으로는 중국의 초안을 위주로 하여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이 중국과 수호 조약을 체결한 데에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바로 류큐 왕국(오늘날의 오키나와)과 조선에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 대해 높은 경계심을 보이고 있었다.


타이완 침공, 목표는 류큐 왕국 합병


 1874년, 일본은 류큐 왕국의 주민이 타이완 호족에게 살해당했다는 걸 핑계로 타이완을 공격했다. 하지만 최종목표는 류큐 왕국을 합병하는 것이었다. 사이고 쓰구미치가 전함을 앞세워 타이완을 공격하자, 랑차오와 스먼에서 타이완인들이 완강하게 저항했다. 청의 관리가 사태 처리를 위해 타이완으로 왔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처음으로 중화권을 침략한 기록으로, 이때부터 70년에 걸친 일본의 침략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동원된 일본군은 모두 3,600명이었다. 이 중 전사자가 12명이었고 병으로 죽은 사람은 561명이나 됐다. 군사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군은 타이완 주둔을 빌미로 중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가 직접 베이징을 방문했다. 처음에는 배상금을 받아내려는 속셈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타이완 동부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부인하더니, 얼마 후 결국 진정한 속셈을 드러내며 500만 냥을 요구했다. 청 정부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일본에 50만 냥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치욕적인 타협안을 체결했다. 일본은 류큐와 청의 종번(종주국과 속국) 관계를 단절시키기까지 하여 훗날 류큐 왕국을 일본 영토에 편입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 놓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베이징에서 담판을 끝내고 톈진으로 돌아온 후 이홍장을 만난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감격스러운 말투로 "귀국의 빠른 대처로 만사가 순조롭게 해결되었소. 그런데 보아하니 귀국에 오래된 폐단이 많아 개혁이 쉽지 않을 것 같소이다."라고 말했다.

 그해 12월, 이홍장은 조정에 일본과의 경쟁이 시급하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려 "일본이 서양식 병볍으로 전환하고 철도와 기차, 전보를 도입하고 탄광을 건설했습니다. 스스로 서양의 화폐를 찍고 학생들을 서양으로 유학 보냈으며 서양에서 돈을 빌리고 영국인들과 손잡고 위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야심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 중국의 동쪽에 군림하겠다며 중국을 무시하고 타이완을 침범했습니다. 서양은 7만 리 밖에 있으나 일본은 지척에 있어 중국의 큰 우환이 될 것입니다."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1879년 3월, 일본은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이름 바꾸고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다. 6월에는 류큐 국왕 쇼타이와 왕실 구성원들을 도쿄로 압송해 류큐 왕국을 정식으로 합병했다. 이제 다음 목표는 조선이었다.

슈리성
류큐 왕국의 왕궁이었던 슈리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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