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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41_중국의 의화단 운동과 러일전쟁의 조짐

by 티제이닷컴 2024.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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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돌려주자, 더욱 특이한 병태적 심리에 빠져 군국주의의 바람이 점점 드세졌다. 이른바 '와신상담'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전 국민에게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전후 처리에 주력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일본은 러시아와 중국, 조선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중국의 의화단 운동과 일본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 입장에서 중국에 요구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조약이었으며, 중국인들로 하여금 일본의 흉악함을 처절하게 확인해 준 계기가 되었다. 중일 양국은 그때부터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이 되었다. 반세기가 넘는 긴 시간 동안 일본은 중국에서 만주사변, 난징 대학살 등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중국을 꺾지는 못했다.

 1900년, 중국에서 대대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인 의화단 운동이 출현했다. 이에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8개국 열강들은 연합국을 조직해 중국으로 군대를 보내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였다. 당시 열강들 가운데 최단 시간에 중국에 대군을 파견할 수 있었던 국가는 일본과 러시아뿐이었다. 

 일본은 이떄, 8국 연합국의 중국 침공 과정에서 무력을 과시하며 열강의 '동북아 헌병'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했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일본은 무려 2만 2000명의 병사를 중국에 파견했다. 이로써 일본은 서구 열강의 작은 파트너에서 중국 침략 연합군의 주력군으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의화단 운동


 청일전쟁 패배 이후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극에 달하자 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모여 의화단을 조직하고 '부청멸양'을 가치로 내세워 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서구 열강의 공사관을 포위하고 서양 선교사 등 외국인을 습격하였으며 철도, 전신 등 서양식 시설을 파괴하는 등 극렬한 폭동을 일으켰다.

동북아 신흥 제국주의

 이 전쟁으로 일본은 처음으로 국제 부대에 참가할 기회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아시아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했다.

 열강들과 중국 북부를 공격하던 일본은 러시아와 일종의 거래를 시도했다. 러시아가 조선의 이권을 포기한다면 중국의 동북 3성을 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북쪽에서는 방어에 주력하며 남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북쪽에서는 이미 주도권을 잡았으니 중국 남부 푸졘의 샤먼에 군대를 파병하자는 것이었다.

 마침 샤먼에 있던 일본의 혼간지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일본은 자국 동포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해군 육전대를 상륙시켰다. 일본이 단독으로 샤먼에 군대를 파견하자, 열강들이 강력히 반대하며 영국의 육전대가 뒤따라 상륙했고, 일본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철수해야만 했다. 중국 남부에 대한 세력 확장 계획이 잠시 지연된 것이다. 상하이에서도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4개국 군대가 공동으로 주둔하며 경쟁하는 상황이 초래됐다.

 중국은 또다시 말할 수 없는 치욕을 겪게 되는데,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과 맺은 조약인 신축 조약이 바로 그것이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4억여 냥의 배상금 가운데 7퍼센트를 획득했다.

신축 조약

 의화단 운동을 구실로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일본 등 열강들이 연합하여 중국을 침략한다. 의화단을 진압한 그들은 군대 철수를 조건으로 지금까지 요구했던 이권보다 더 많은 불합리한 조건을 요구하였고, 결국 청나라는 이에 굴복하여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 역시 외국 군대 주둔, 막대한 배상금 지급, 베이징 내 공사관 구역 설치 등이 포함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러시아 vs 일본, 전쟁의 조짐

 8국 연합군이 베이징에서 철수했지만, 동북 3성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는 차일피일 철수를 미루고 있었다. 1901년, 영국 '타임스'는 러시아가 청나라 봉천장군을 위협해 비밀 협정을 맺은 내막에는 동북 3성을 독점하기 위한 속셈이 깔려 있다고 폭로했다. 러시아가 중국 동북 3성에 대해 본격적인 세력 확장을 시작하자, 영국과 일본이 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는 제4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구성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요야마 이와오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필히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러시아에 중국 동북부를 내어주는 대신, 일본은 한반도를 점령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주영 대사에게 개인 신분으로 영국과 교섭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1902년에 직접 열강을 순방하며 동맹 대책에 대해 논의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방문한 후, 외교대신 람스도르프, 재무대신 위테와 회담을 가졌다. 러일 협상 비망록을 체결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고, 조선 영토를 군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 조선 해협의 자유로운 교통을 위협하지 않고, 조선 내의 자유로운 활동을 인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반도를 독점하기 위한 이토 히로부미의 이 같은 요구를 러시아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랴오둥반도에 상륙하여 러일전쟁을 준비하는 일본군의 모습
러일전쟁 당시 랴오둥반도에 상륙하는 일본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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