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10월 말, 일본 군대가 갑자기 중국 칭다오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에게 총공세를 가했다. 이 전투에 영국군 1,000명도 참가했다. 11월 7일, 칭다오의 독일군이 투항함으로써 일본군이 칭다오를 관리하고, 독일의 전쟁 포로들은 도쿄 전쟁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속 일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유럽 협약국과 동맹국이 참전했는데,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본 정치계는 이 전쟁에서 한 줄기 빛을 봤다. 원로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 전쟁은 다이쇼 시대의 천우이다."라고 외쳤다.
일본 정부는 곧 참전 준비에 착수했다. 전쟁이 일본 경제에 큰 이익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열강의 간섭이 줄어든 틈을 타 동북아에서 본인들의 지위를 강화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여태 독일식 군대, 헌법을 따르던 일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독일의 손을 잡지 않았다. 독일이 분명히 패전할 것인데, 이 경우 러시아가 중국의 자오저우만을 전리품으로 가져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 산둥을 공격해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 지역을 선점하기로 했다. 중국 북부 뤼순과 남부 푸졘에 이미 교두보를 마련했으니 중간 지점을 공격해 중국을 반으로 나눈다는 계획이었다.
일본은 칭다오를 점령한 후, 영국군은 서둘러 철수했지만 일본군은 철수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항일 운동이 일어나 일본에 칭다오 반환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을 때,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은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청나라 위안스카이에게 중국을 망국으로 몰아넣는 21개 조를 요구한 것이다.
1915년 1월 18일, 일본 공사 히오키 마쓰가 비밀리에 위안스카이를 찾아왔다. 그날 오후 위안스카이는 중난하이 화이런탕에서 히오키 마쓰를 접견했다. 히오키 마쓰는 그 자리에서 21개 조를 위안스카이에게 제시하며 서둘러 응답할 것을 요구했다.
이 조항은 모두 5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사실상 중국을 철저히 일본 통제 아래에 두고는 결국 멸망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서구의 어느 열강도 이만큼 가혹한 조건까지 제시한 적은 없었다. 일본의 중국에 대한 야욕이 그 어떤 나라보다도 강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통상적인 외교 절차를 무시하고 직접 대총통에게 이러한 요구를 전달한 일 역시 국제 관계에서는 보기 힘든 사례였다.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지연과 기밀 누설 등의 전술을 이용해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계획의 모든 부분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근본적인 목표는 실현한 셈이었다. 일본은 그 후 만주, 몽골과 산둥에서의 지위를 보다 공고히 하고, 다음 목표인 화중, 화난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국내 자본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가져다준 호황을 제대로 맞이하며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1915년, 대외 무역의 발전 속도가 중화학 공업의 발전 속도를 초월하고, 공업 생산량이 전체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다. 일본은 채무국에서 단숨에 채권국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방직 자본이 중국에 진출해 일본 기업들이 칭다오와 상하이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소련의 등장은 어떤 식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을 도움을 주었을까
1919년 1월 18일, 파리 외무성에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이권 분배 문제 및 전후 처리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를 개최했다. 일본은 원로인 사이온지 긴모치와 오쿠보 도시미치의 아들 마키노 노부아키, 젊은 고노에 후미마로를 회의에 출석시켰다.
이 회의에서 일본은 또 한 번 기회를 맞이한다. 본래 영국과 미국은 중국에서의 일본 세력 확장을 잠시 눈 감아 주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계획은 무산돼 버린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진 것이다.
윌슨 미국 대통령은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연맹을 설립하자고 제안했고, 일본은 아시아의 중요한 맹방이 되기에 영국과 미국은 중국을 희생시켜 일본과 타협하기로 결정한다.
중국 대표가 파리 강화회의에서 산둥의 권력을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이 베이징까지 전해졌다. 5월 4일, 베이징 학생 3,000여 명이 천안문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로써 5.4 운동의 막이 오르며, 중국 근대사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전국적으로 여론의 분노가 들끓자, 중국 대표단은 베르사유 조약(1919년 6월 28일, 파리 강화회의 결과로 31개 연합국과 독일이 맺은 강화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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