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미국 정부가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 9개국을 초청해 워싱턴에서 회의를 열고, 일본에 강한 공세를 펼쳤다. 미국은 일본에 해군의 군비 확장을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미국과 영국, 일본이 각각 5:5:3의 비율을 유지하기로 합의해, 일본 주력 군함의 규모는 영국과 미국보다 21만 톤 적은 31만 톤을 넘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 문제에 있어서 미국은 문호 개방과 기회균등의 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나 중국이 요구한 영사 재판권 취소와 관세 자유 실현, 조계지 반환 등의 요구와 산둥 문제 해결, 1915년에 체결된 21개조 요구 폐지 등의 조건은 일본이 배상금을 받고 산둥에서 철군하기로 합의하는 데 그쳤다.
워싱턴 회의를 계기로 동북아에 새로운 정치 국면이 형성되었다. 영일 동맹이 취소되고, 열강은 일본이 세계대전 시기에 중국에서 얻은 독점적인 지위를 부인했다. 이로써 중국은 몇몇 열강이 공동 지배하는 상태로 되어갔다.
세계 최후의 전쟁론
1927년 6월 27일, 일본 도쿄에서 동방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일본이 중국 북벌군의 북진과 중국 통일을 저지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였다. 일본 총리 겸 외상인 다나카 기이치는 중국 침략에 대한 야심이 누구보다 큰 인물이었다. 이 회의에서 훈시하듯 '대중 정책 강령'을 발표했다. 이 강령의 핵심은 만몽(만주와 몽골)과 중국 본토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1929년 12월, 중국의 '시사 월보'는 1927년 7월 25일 다나카 기이치가 일본 천황에게 '만몽에 대한 제국의 적극적인 근본 정책'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제출했다고 전했다. 훗날 '다나카 상주문'이라고 불리게 된 이 유명한 문건은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만몽을 정복해야 하며,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을 먼저 정복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문건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이 같은 관념에 근거해 침략을 자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나카가 동방 정책을 내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은 북벌군의 지난 진출을 막기 위해 지난에서 대학살을 자행한 지난 사변을 일으키자, 장제스가 이끄는 북벌군은 어쩔 수 없이 지난을 돌아 북벌을 계속했다. 다나카가 장쭤린에게 철수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한다. 이때, 관동군(중국 침략을 위해 관동에 주둔했던 일본 육군 부대를 통칭)은 정부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무력을 발동했다. 고모토 다이사쿠의 주도 아래 황고둔에서 장쭤린을 폭사한 것이다.
1928년 12월 29일, 일본인의 간섭을 거절한 장쉐량이 난징의 국민정부를 차지함으로써 중국은 형식적인 통일을 이루었고, 31일 국민정부는 장쉐량을 동북변방군 총사령으로 임명했다.
다나카가 심혈을 기울여 수립한 중국 동북부 분열 음모가 수포가 되고, 그로부터 1년 후 다나카 내각은 와해하였다. 그러나 무력으로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려던 음모가 다른 곳에서 이미 세워지고 있었다.
1929년 10월,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적인 대공황이 전 세계를 경제 침체로 만들어놨다. 5개월 후, 일본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미국으로 수출하는 생사 가격이 폭락하더니 방직공업 전체가 어려움에 봉착했다. 1931년, 일본의 대외 무역이 절반으로 감소했다. 공업 생산 규모도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으며 해외로 나가는 금 유출이 심각했다. 농촌에서는 전체 농가 약 40퍼센트를 차지하던 잠업 농가가 어려움에 부닥쳤다. 그해 풍년이 들었지만, 쌀값이 생산 원가 절반 수준까지 하락했다. 도시 실업자와 반실업 상태인 사람들이 300만 명에 달했으며, 일본의 식민 국가에서는 침략에 저항하는 운동이 점점 거세졌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물론 사회적으로 나날이 대두되는 파시즘 세력이 해결 방법을 모색했다. 하마구치 내각은 경제 군사화를 실시해 국력 증강을 명분으로 육·해군 경비를 대폭 확충했다. 대재벌인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와 신흥 재벌들이 잇따라 군수 공업에 진출해 침략 전쟁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내각과 독립된 군부는 천황의 명령에만 복종했으며, 육군 소장파들은 일본이 동방 회의에서 내세운 '만몽 분리 정책''에 따를 것을 희망했다. 구체적인 실시 단계에서 한쪽에서는 국내 정당 정치를 전복시켜 군부 내각을 수립한 후 대외적으로 무력 확장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시와라 간지를 주축으로 한 다른 한쪽에서는 만몽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면서, '세계 최후 전쟁론'을 내세웠다. '동양 문명을 대표하는 일본'과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미국' 사이의 대규모 전쟁 발발이 불가피한 가운데, 일본의 유일한 활로는 바로 만몽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만몽을 점령하는 것은 소련의 침략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광활한 땅에서 일본인들이 기업을 경영하고, 중국인들은 소상인이나 육체노동을, 조선인들은 농사를 짓도록 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계책이었다. 관동군 내부에서 '이시와라 구상'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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