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표면적으로는 중·일 관계가 매우 평온한 것처럼 보였지만, 4월부터 일본군이 핑진(현재 베이징과 톈진) 근교에서 군사훈련을 시작하였으며, 6월에는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내부에서 군대의 이동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난징 대학살,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
일본 도쿄 정치계의 소식통 사이에서는 칠석날 밤에 화베이에서 9.18 만주사변과 같은 사건이 재연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았다. 같은 해 7월 초,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육군대신 스기야마 하지메가 중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천황이 소련 군대가 걱정이라고 말하자, 스기야마 하지메는 "중국과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2~3개월이면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충돌한 사건을 발단으로 일본 군국주의 세력들의 중국에 대한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7월 27일, 천황이 국가령을 비준하자, 일본군이 베이징과 톈진에 대한 총공세를 개시했다.
8월 13일, 일본 해군과 공군이 상하이를 공격한다. 이로써 중국 북부와 남부에서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화베이에서는 일본군이 9월에 타이위안을 점령하고, 11월 초에는 허베이와 차하얼, 산시, 수이웬, 산둥 일부 지역을 점령해 화베이와 네이멍구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상하이에서는 수세에 몰린 일본군이 병력을 계속 늘려 주요 격전지가 되었다. 이어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수도인 난징에 직접 총을 겨누었다.
11월 19일, 결국 국민정부는 충칭으로 이전했다.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그 후 몇 개월 동안이나 일본군은 난징에서 세계 역사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장기간의 대규모 학살을 일으켰다. 난징 대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만 30만 명에 달했다. 일본군의 잔혹한 학살로 난징은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도쿄에서는 민중들이 피에 굶주린 괴수들을 지지하는 행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난징 대학살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공포심을 조성해 섣불리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의도와는 달리 중국인들은 일본에 더욱 분노하였으며, 항전 의식만 부추기는 결과를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난징 대학살을 지휘했던 마쓰이 이와네와 하시오, 그리고 중국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범죄자들은 각각 동북아 군사 법정과 중국 군사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 뒤 일본군은 중국의 해안선 대부분을 통제하고 연해 지역을 대부분 점령했으며 내륙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일본은 육군 전체 34개 사단 가운데 2개 사단을 각각 국내와 조선에 1개 사단씩 주둔시킨다. 그리고 8개 사단은 중국 동북부에 주둔시킨 후, 나머지 24개 사단은 화베이와 화중, 화난의 전투지로 파견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전후방 협공으로 수세에 몰려 일본의 속전속결 전략이 수포가 되고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불안한 국제 정세, 2차 세계대전 발발
그러던 어느 날, 위만주국 변경의 장구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과 소련군 사이에 갑자기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기계화 부대를 앞세워 압도적 우세로 일본군을 격파한다. 또 몇 개월 후에는 일본군이 또다시 위만주국 서북부와 외몽골 변경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고, 이 사건은 금세 일본과 소련 간의 국경 전쟁으로 번졌다. 전쟁을 도발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타격을 입고 그 어떤 이득도 얻지 못한 채로 1개 사단 전체가 궤멸하였다.
일본의 북진 전략이 철저히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소련과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유럽의 변화 역시 일본의 주의를 끌었다.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군이 폴란드를 공격한 후, 몇 개월 동안 파죽지세로 유럽의 독립 국가들을 차례로 함락시킨 것이다. 프랑스가 패전하자 열강들에 의존하고 있던 일본 정치 국면에도 다시금 큰 변화가 일어났다. 나치독일이 유럽 전선에서 승승장구하자 일본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식민지 삼고 있던 아시아 국가들을 드디어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을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구호로 삼았던 '대동아 공영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련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고 북진까지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남진에 힘을 쏟기로 결정한다. 내각 회의에서 대동아 공영권을 기조로 하는 '기본 국책 강요'를 발표했다. 대동아 공영권은 서시베리아 동부, 내몽골과 외몽골, 만주, 중국, 동남아 각국과 인도 및 대양주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일본 역시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며 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 들어가기 위한 수순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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