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에 기반한 기본 국책 강요를 제정하면서 프랑스 정부와도 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베트남 북부로 진격하고서,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세계를 분할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3국 동맹을 맺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유럽의 새로운 질서에서 독일과 이탈리아가 갖는 주도적 지위를 인정했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대동아의 새로운 질서 구축에 있어서 일본의 주도적인 지위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 조약은 3국과 소련의 정치적 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중일전쟁과 유럽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제3 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이 조항은 바다 건너에서 고립주의를 유지하고 있던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가 수립하려는 '새로운 세계 질서'는 세계를 대동아권, 아프리카를 포함한 유럽권, 미주권, 소련권 4개 권역으로 나누고 영국의 지위를 네덜란드와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남진을 위해 일본은 소련과 중립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몽골인민공화국의 영토 불가침을 존중하고, 소련은 만주국의 영토 불가침을 존중하여 북부의 안정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 조약을 통해 소련은 동북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유럽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고, 일본 역시 다른 걱정 없이 남진에만 온 힘을 쏟을 수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어기면서까지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는 소련 정반대 쪽에 있는 일본까지 미쳤다. 일본은 또다시 북진이냐 남진이냐에 대한 논쟁이 불거졌지만, 이윽고 남진을 주장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태평양전쟁 도발, 미국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미국은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반도로 진출하는 것에 대해 강한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미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였으며, 영국과 네덜란드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내렸다. 며칠 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까지 완전히 중단했다.
1941년 7월 31일, 해군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가 천황을 알현한 자리에서 "3국 동맹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조정할 수 없기에 석유 공급도 중단되었습니다. 현재 저장량이 2년 정도 사용할 양밖에 남지 않았으며, 전쟁을 치르면 1년 반이면 석유가 바닥이 나고 맙니다. 그러니 곧장 무력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11월 3일,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 대장의 명령에 따라 진주만 습격을 핵심으로 하는 방대한 남진 계획을 수립하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육군 참모총장, 해군 군령부 장관이 작전 방안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12월 2일, 천황이 해군 12호 명령을 내리고 공격 개시일을 12월 8일로 결정했다. 그렇게 12월 8일 새벽, 일본 육·해군이 갑자기 말레이시아와 코타바하루와 태국의 송클라 지역을 습격하고, 1시간 후에는 미국 진주만의 해군 기지를 공격했다. 몇 시간 후에는 필리핀 루손섬 중부의 클라크 공군 기지를 폭격했다.
다음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국회에서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동시에 전쟁을 선포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망상이 중국 정복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정복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때부터 2차 세계대전이 세계를 무대로 진행됐다. 1942년 1월 1일,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의 주도로 26개국 '연합국 선언'을 발표했고, 국제적인 반파시즘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일본군은 짧은 시간 내에 거센 기세로 남진을 전개해 12월 홍콩과 태국을 점령하고 미국 해군 기지가 있는 괌과 웨이크섬에 폭격을 퍼부었다. 1월에는 말레이시아를 점령하고, 2월에는 싱가포를 공격해 말라카 해협을 손에 넣었으며, 3월에는 네덜란드령인 동인도 제도로 진출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필리핀까지 점령했다. 서남태평양에서도 비스마르크 군도, 뉴아일랜드 군도, 뉴브리튼섬, 솔로몬군도, 뉴기니 북부가 일본군에게 짓밟혔으며, 호주까지 위협당했다.
일본의 파죽지세로 1942년 봄, 일본군은 동남아의 광활한 영토와 남중국해, 남태평양에 있던 영국과 미국의 해군 및 공군 기지를 모조리 손에 넣으며, 미국의 태평양 함대와 영국의 동북아 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1월 초에는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의 지원 루트였던 미얀마 군도를 공격하고 인도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초반에 엄청난 속도로 승리를 거두던 일본군의 기세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몇 개월 후 미드웨이섬에서 일본 해군이 미국에 대패당하여 항공모함 4척이 침몰하고 수많은 해군 항공군이 전사했다.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섬에서 일본은 엄청난 군사력 손실을 본다. 결국 미국이 과달카날섬 점령에 성공했으며, 이 전투를 기점으로 일본은 미국에 번번이 패한다. 태평양전쟁이 전환점을 맞이했다.
'역사학 >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근현대사]#50_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전후처리 (0) | 2024.01.23 |
---|---|
[일본 근현대사]#49_두 개의 원자폭탄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 (0) | 2024.01.23 |
[일본 근현대사]#47_난징 대학살과 태평양전쟁 발발 (0) | 2024.01.22 |
[일본 근현대사]#46_일본의 만주사변과 중국의 국공합작 (0) | 2024.01.17 |
[일본 근현대사]#45_대공황과 군국주의 길을 걷는 일본 (0) | 2024.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