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6_막부의 대외 개방,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by 티제이닷컴 2023. 12. 21.
728x90
반응형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한 후, 막부는 통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인 천황의 위엄과 숭배 정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막부는 천황과의 대립적인 분위기를 완화하고, 조정과 막부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무 합체를 실시했다. 그런데 정치 무대에 등장해 막부와의 연합을 통해 내우외환을 극복하고, 봉건 통치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웅번 다이묘들 가운데 가장 실력이 막강한 세력으로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 지역)과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 지역)이 되었다. 이 두 번의 연합을 '삿초 동맹'이라 한다.

조슈번 위치
조슈번의 위치(현 야마구치현)
사쓰마번의 위치
사쓰마번 위치(현 가고시마현)


 해안이 인접해 있는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막부 말기에 막부가 무력해지는 것을 보고, 각자의 번에서 먼저 개혁을 실시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증강했다. 조슈번은 농촌의 관리 계층을 지원해 농업 생산을 장려하는 것과 동시에, 농민들을 모집해 군제를 개혁했다. 1855년, 조슈번은 요가쿠쇼를 설치, 서양의 기술을 연구하고 군제와 전술 등에 관한 내용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조슈번은 산업 분야에서도 조선소를 설립하고 대형 선박 건조에 착수했으며,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인재를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사쓰마번은 군수 공업을 위주로 1856년부터 영국 해군을 좇아 수병대를 설치하고, 서양식 대포를 도입하였으며, 유선 전신 설비를 구축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물론 도사 번과 히젠 번 모두 이 과정에서 강력하고 안정된 정치권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슈번의 나가이 우타는 번주에게 개국 항해를 펼칠 것을 주장하며 막부가 황국의 정부임을 인정해다. 1862년에는 사쓰마번의 번주 타다요시의 부친인 시마즈 히사미쓰가 조정의 칙명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진격했다. 이 시기에 막부 정권은 개국 조약에 부응하는 개국 체제를 건립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막부는 에도에 반쇼시라베쇼를 설치해 지식을 전파하고 인재를 양성하도록 했으며, 필수 과목을 네덜란드어에서 영어로 변경했다. 또한 같은 해에 정련방을 설치해 군사, 화학 및 야금 기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1년 후에는 물산학과도 설치했다. 이 학교는 전문 인력양성이라는 명확한 군사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막부는 또 선박 건조를 위해 나가사키에 제철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1862년 1월, 막부는 유럽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당시 사절단에 후쿠치 겐이치로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젊은이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후 네덜란드로 파견된 15명의 1차 유학생 중에는 훗날 메이지 시대에 큰 활약을 한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츠다 마미치, 니시 아마네가 있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해군학을 공부했고, 츠다 마미치와 니시 아마네는 사회 과학과 인문과학을 연구했다. 수십 년 후, 당시 사절단 중 한 명이자 훗날 유명한 계몽사상가가 된 후쿠자와 유키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큐 원년 겨울, 막부가 유럽 각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나 또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에 가게 되었다. 이듬해 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러시아, 포르투갈 등을 둘러보았는데, 초음 보는 수많은 문물에 눈과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병원, 빈민원, 맹아원, 정신병원, 박물관, 박람회 등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느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게 없었고, 그 기능과 역할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의 마음속에는 한없는 놀라움과 함께 부러움이 교차했다. 그것들을 일본으로 도입하고 싶어 마음이 용솟음쳤다. 그해 유럽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모두 기록했다가 귀국 후 정리해 서양 저서들을 참고해 책으로 저술했는데, 그 책이 바로 '서양사정'이다.

 훗날 후쿠자와 유키치의 말에 따르면, 이 책 위조본의 부수가 25만 부에 달했다고 한다. 이 견문록은 당시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견해와 상당히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계몽주의의 기념비적인 의의를 지니는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해, 막부가 당시 중국의 실상황과 무역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치토세 마루를 중국 상하이로 보내자, 세력이 강한 번들도 문무를 겸비한 사무라이를 보내 수행하게 했다. 조슈번의 다카스기 신사쿠와 사쓰마번의 고다이 도모아쓰도 이 배에 올랐다. 사무라이들은 상하이에서 중국이 일본이 예상한 것보다 크게 못 미치는 데다 심각한 사회 문제가 만연해 있었으며, 서구 열강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한 현실을 마주했다. 이즈음부터 일본은 중국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이는 아시아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만들어냈다.

 조슈번의 다카스기 신사쿠는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이었으며, 당시 양이파의 주도자였다. 그는 중국이 쇠락한 원인과 해안 방어 상황을 분석했고, 쇠락의 원인이 해안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중국은 1만 리를 항해할 수 있는 군함과 사정거리가 수십 리에 달하는 대포를 만들 수 없고, 지사들이 번역한 '해국도지' 등이 모두 절판된 후 허송세월하며 안일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니 일본은 중국과 같은 절차를 밟지 않기 위해 서둘러 증기선을 건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막부가 점진적으로 개국 체제와 공무 합체를 시행하고 있을 때, 존왕양이 운동도 점점 거세졌다. 이때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이었던 구사카 겐즈이가 '민간 연합론'을 펼쳤다. 그는 "번끼리 연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선 번과 정부를 배제하고, 각 번의 뜻있는 사람들이 서로 연합해야 한다. 그러니 이를 위해 존왕양이 파 지사들과 연락해 애국 역량을 한데 모아 민족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