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마무리
20세기 초, 로마 교회는 잔 다르크를 '성녀'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꽃다운 스무 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화형 당한 소녀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짧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삶을 살며 조국인 프랑스를 지키고 프랑스에 배신당한 잔 다르크는 자신의 목숨을 영원한 명예와 맞바꾸었다. 당시 판사는 그녀에게 국왕의 대관식에서 왜 전장의 깃발을 올렸는지 물었다. 잔 다르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공이 있는 사람이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도 그녀의 영광이 바로 프랑스의 명예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에게 잔 다르크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다.
잔 다르크의 가치에 대해서는 프랑스인보다 영국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의 한 대신은 잔 다르크가 죽자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큰일이 닥칠 것이다. 우리가 성녀를 죽였기 때문이다." 사실, 샤를 7세도 잔 다르크의 가치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왕과 대신들에게는 살아있는 '영웅'보다는 죽은 '성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전쟁의 개념이 아닌 '정치'가 개입됐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는 군사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참신한 전술이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쩌면 직접 영국인을 죽인 적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존재이지, 뛰어난 전사는 아니었다. 당시 패배를 거듭하던 프랑스군에게는 무엇보다 병사들의 사기 저하가 큰 문제였다. 그들에게는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다. 오를레앙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수는 영국군보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 그때 잔 다르크가 등장하여 프랑스군에게 자신감과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비록 짙은 종교적 색채를 띠며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출현했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프랑스의 가장 귀한 보물이 되었다.
잔 다르크의 죽음은 전화가 아니라 음모와 술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승리와 죽음은 프랑스인의 민족정신을 크게 고취했다. 그녀의 죽음은 프랑스 각 세력 간의 화해와 결집의 계기가 되었다. 1453년, 샤를 7세는 마침내 부르고뉴파의 도움으로 파리를 되찾았고, 1441년에는 상파뉴, 1450년에는 멘과 노르망디, 1453년에는 기옌을 되찾았다. 1453년 10월 19일에 영국군이 보르도에서 항복함으로써 프랑스는 칼레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되찾았고, 백년전쟁은 끝이 났다.
백년전쟁은 그 대부분의 초점이 잔 다르크를 중심으로 한 짧은 시기에 맞춰져 있지만, 116년 동안이나 지속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겪으면서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적이 바깥에 있는 영국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이 전쟁을 통해 프랑스인은 민족의식이 더 고취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운명 앞에는 백년전쟁보다 더한 좌절도 있었지만, 수많은 어려움 앞에서도 프랑스인들은 자존심과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볼테르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조국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영웅을 위해 제단을 마련해야 한다면, 그 자리는 바로 잔 다르크의 차지가 될 것이다." 이렇듯 백년전쟁과 잔 다르크는 프랑스 정신을 확립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백년전쟁, 영국의 무기 : 장궁
장궁은 웨일스 남부 지방에서 유래했다. 최초의 기록은 1150년에 등장한다. 웨일스는 기복이 심한 지형으로, 곳곳에 밀림과 산이 많아 기습에 유리했다. 웨일스인들은 용맹스럽고 호전적이었다. 로마인이 물러간 후 앵글로색슨인과 바이킹 등 침략자들은 모두 웨일스 정복에 실패했다. 오랜 전쟁 동안 웨일스인들은 간단하고도 실용적인 무기인 장궁을 제작했다.
장궁은 길이가 보통 1.5미터 정도에 양쪽이 대칭을 이룬다. 길이가 긴 것은 1.8~2미터 되는 것도 있었다.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1미터 정도의 활보다 길었고, 훨씬 위력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활의 탄성을 높이기 위해서 잘 휘지 않는 튼튼한 재료를 사용했고, 자연히 활의 길이도 점차 길어지게 되었다. 활의 등 부분은 이음새 없는 나무를 구부려서 만들었다.
고급 활은 주로 주목으로 만들어 단단하고 탄성이 있었다. 주목은 온난 습윤한 지중해 연안에 주로 서식하는 품종으로, 대표적인 서식지는 이탈리아 티레(현 레바논 남부 도시), 그리스 크레테 등지였다. 그중에서도 스페인 카스티야에서 생산되는 것이 가장 질이 좋았다.
영국 국왕은 주목을 확보하기 위해 특별관세를 부과했다. 즉, 유럽 대륙의 포도주를 수입할 때 포도주 한 병당 반가공 상태의 주목 몇 그루를 관세로 매기는 방식이었다. 영국에서도 질 좋은 주목이 생산되긴 했지만, 수량이 극히 적은 데다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엄격히 사용을 금하고 있었다. 흑세자 에드워드가 스페인을 원정할 때, 원시적인 투창으로 무장한 스페인 군대를 장궁으로 물리쳤다. 이에 화가 난 스페인은 주목을 모두 베어버리도록 하는 법령을 시행하기도 했다.
영국의 일부 지방은 사내아이가 아홉 살이 되면 활쏘기를 가르쳤다. 당시에는 활쏘기를 배워 장궁수로 성장하는 것이 사내아이들의 꿈이었다. 용병이 되어 국왕이나 왕세자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면, 경제적으로 농사를 지어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훨씬 많았다. 더군다나 전리품 가운데 3분의 1은 군인들의 몫이었다. 이렇게 번 돈이나 옷 등을 고향으로 보내면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장궁을 보유하고 있던 영국군은 거의 매번 승리를 거뒀고, 전사할 확률도 낮았다. 어떤 궁수는 퇴역 후에 다시 군대로 돌아가 직업군인 대접을 받았다. 이에 따라 더욱 많은 사람이 군인이 되기를 원했고, 정부는 경쟁을 통해서 군인을 선발했다. 장궁 부대가 탄생한 이후부터 이는 강한 정예부대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 요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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