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46 [영국]#52_영국의 루너 소사이어티 그리고 증기기관차의 등장 산업가의 산실, 루너 소사이어티 루너 소사이어티(Lunar Society, 달 협회)는 영국 중부의 산업지대에서 생겨난 모임이다. 회원들은 대부분 버밍엄 혹은 그 근처에 거주했고, 모두 산업사회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공장주만 아니라 의사나 과학자, 자연철학자, 교사 등 각기 다른 배경을 지난 사람들이 매달 모임을 가졌다. 18세기에 영국의 중부지역은 이미 산업의 중심지였고, 이들은 과학에 매우 깊은 관심을 보였다. 회원들은 대부분 선진적인 사고와 현대적인 의식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한 달에 한 번씩 보름달이 뜨는 밤에 모여 자연철학과 공업, 의학 등에 대한 문제를 토론했다. 모임의 명칭은 주로 밤에 모이던 이들이 밤길에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달 밝은 밤을 택했다는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 2024. 8. 21. [영국]#51_근대 과학의 발전과 프랜시스 베이컨 영국, 근대 과학의 발전 1785년, 영국에는 증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최초의 면방직 공장이 들어섰다. 1830년대 이후, 증기 동력은 면방직 산업에 널리 보급되었고 차츰 수력의 비중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의 선두에 섰던 면방직 산업은 또다시 증기 동력 기계를 도입한 최초의 산업이 되었다. 기계의 증기 동력화가 완성되면서 공장제도가 점차 확립되기 시작했다. 1840년이 되자 면방직 산업에 종사하는 공장노동자 수는 수공 노동자 수의 두 배를 넘어섰다. 와트 기관의 등장으로 인해 방직, 채광, 야금 등의 산업도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특히 와트 기관을 제작하는 기계제조업이 특수를 누렸다. 1812년에는 증기기관을 이용한 선박이 등장했고, 1814년에는 조지 스티븐슨이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차를 제작하여.. 2024. 8. 20. [영국]#50_증기기관의 등장, 산업혁명에 박차를 가하다 증기기관의 등장, 산업혁명에 박차를 가하다 부와 명예를 갈구하던 대부분의 영국인은 모두 신기술과 신발명에 대해 열광적인 숭배에 빠져들었다. 당시 영국의 한 간행물에서는 "산업 기술의 발전은 전쟁이나 외교보다 더 큰 실리를 가져다준다. 이는 교회나 대학의 기능을 넘어서며, 추상적인 철학과 문학보다 더 크게 사회에 기여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 법률보다 앞서는 것이 바로 기술의 발전이다."라고 논평했다. 전 국민이 기술개발에 몰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당시, 영국에 신흥계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기술과 발명에 가장 밀접하고 가장 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당시 '공장주'라고 불리던 이들 신흥계층은 오늘날에는 '기업가'라고 불린다. 1773년의 파산으로 절망에 빠진 와트를 구해준 이가 바로 매튜 .. 2024. 8. 19. [영국]#49_ 산업혁명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의 생애 글래스고와 북아메리카를 이어준 담배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는 당시 유럽 담배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담배 무역상들은 영국의 담배 교역량 중 절반 이상을 독점하고 있었다. 와트의 조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담배 무역상들이 돈을 버는 방법은 아주 효율적이었다. 우선, 영국제 방직물과 기타 완제품을 배에 가득 싣고 콜럼버스가 발견한 뱃길을 따라 북아메리카로 갔다. 그리고 버지니아 등의 영국 식민지에서 물건을 다 팔고 나면, 그곳에서 생산한 담배를 가득 싣고 글래스고로 돌아온 뒤 유럽 각지로 역수출하는 것이었다. 배에 항상 화물이 넘쳐날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무역업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와트의 부친은 윗세대의 경험을 물려받아 조선소 사업을 벌였다. 그곳에서도 영.. 2024. 8. 16. [영국]#48_산업혁명이 태동하는 영국의 상황 왜 산업혁명은 방직기로 시작하였는가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 삼으면서 오히려 목화 산지인 인도에 거대한 시장을 제공한 꼴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 대중들 사이에서 인도에서 수입한 우수한 면직물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영국 내 면직물 소비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영국의 방직업은 모직물 중심이었기 때문에 인도의 수공 면방직과 근본적으로 경쟁이 되지 않는 면직물은 거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그 당시 영국은 자유무역 정신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1700년, 중상주의를 기본 국책으로 표방하던 영국 의회는 방직 업체들의 거센 압력을 받아 인도산 면직물인 캘리코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킨 데 이어 이를 판매하는 것도 금지했다. 하지만 식민지에 불과했던 인도는 영국의 이러한 보호무역 조치에 아무런 .. 2024. 8. 15. [영국]#47_미국의 독립과 영국 면직물 산업의 호황 잘 나가던 대영제국과 미국의 독립 영국은 식민지를 날로 팽창하면서 핵심사업의 하나인 무역 블록 형성도 활발해졌다. 이에 대해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제번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북아메리카와 러시아의 평원은 영국의 옥수수농장이고, 시카고와 오데사는 식량창고이다. 캐나다와 발트해는 영국의 숲이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양 목장에 해당하였다. 아르헨티나와 미국 서부 초원에는 영국의 소 떼가 자랐고, 페루에서는 백은을 보내온다. 남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황금이 런던으로 흘러 들어오고, 인도와 중국에서는 영국으로 보낼 찻잎을 재배한다. 동인도 제도에서는 커피, 사탕수수, 향료 등을 들여온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영국의 포도밭이고, 지중해는 과일 농장이다. 영국인은 미국 남부에서 재배되는 목화를 오랫동안 써왔지만.. 2024. 8. 14. [영국]#46_영국, 프랑스를 밀어내고 세상을 호령하다 7년 전쟁을 대하는 영국의 자세 그래도 동맹국으로서의 의리를 보이기 위해 영국은 독일 서부에 6만 군대를 주둔시켰다. 하지만 이 부대의 활약은 프랑스군에 첫 승리를 거둔 이후로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1760년, 이 지원군은 러시아 군대가 프로이센을 침공해 수도 베를린을 유린하는 것을 좌시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수수방관했던 것과는 달리 해상과 해외식민지 쟁탈전에서는 강대국의 위용과 기개를 드러냈다. 영국 해군은 프랑스 연안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연안 도시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다. 북아메리카와 인도 식민지 쟁탈전에서는 막대한 전쟁 이익을 얻기 위해 그야말로 전력투구를 펼쳤다. 영국은 해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면서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만약 식민지 전쟁이 전 세계로 .. 2024. 8. 13. [영국]#45_유럽내 전쟁을 통해 프랑스를 견제하다 젠킨스 귀 전쟁 때로 전쟁은 상상을 뛰어넘는 해괴한 이유나 사소한 일에서 촉발되기도 한다. 강대국 간의 전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때마침 발생했다. 1738년 의회가 개회 중일 때, 로버트 젠킨스라는 영국 선장이 하원을 찾아왔다. 그는 잘린 귀가 담긴 병을 꺼내 보이며 1731년에 스페인 경비대에 나포되었을 때 귀를 잘렸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의회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정의를 실현해 줄 것을 청원했다. 젠킨스 선장은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서했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젠킨스의 출현은 영국 의회의 반스페인 정서에 불을 지폈다. 정권을 잡고 있던 휘그당 당수 로버트 월폴은 여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영국 군함을 지중해로 파견했다. 영국.. 2024. 8. 12. [영국]#44_유럽 열강의 각축전 유럽 열강의 각축전 1500년 이후 강대국 간의 경쟁에서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한 세기마다 영국의 경쟁상대가 바뀌었고, 상대국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영국은 더욱 강대해졌다는 점이다. 16세기에 영국의 적수는 스페인이었다. 영국인은 이 노련한 식민지 강국을 침몰시키고 새로운 해양 강국으로 떠올랐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를 누르고 세계 최강의 해양 강국으로 등극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쟁탈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접전을 벌인 결과, 승리를 얻게 된다. 1688년의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바다의 마부'로 불리던 네덜란드를 꺾고 신흥 해상 패권국이 되었다. 하지만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유럽 대륙의 패권국가인 프랑스와의 결전을 피할 수 없었다.. 2024. 8. 11. 이전 1 2 3 4 5 ··· 2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