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46 [영국]#29_영국 내전 마무리, 찰스 1세 처형 찰스 1세가 처형되기까지 1649년에 이르기까지 찰스 1세는 국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수년간 전란의 고통을 안겨주고 영국 내전을 초래한 주범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단지 나라가 정상을 회복하고 안정을 찾기를 바랐지만, 국왕이 체포된 이후 갈수록 과격한 방향으로 치닫는 것을 보고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1649년에 찰스 1세가 사형판결을 받는 순간에도, 그는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에게 여전히 존귀한 국왕이었다. 그해 찰스 1세의 처형일인 1월 30일 아침, 아주 특별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사형수가 된 찰스 1세는 감옥에서 화이트홀 궁전의 왕실 연회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그곳은 바로 부왕 때부터 찰스 시대까지 공사감독관을 지낸 이니고 존스가 왕실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설계한 건축물이었다. .. 2024. 7. 19. [영국]#28_영국내전의 끝, 의회는 승리하고 찰스 1세는 처형당하다 영국 내전, 왕당파 vs 의회파 1642년 8월 22일, 결국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날 찰스 1세는 노팅엄에서 깃발을 높이 쳐들고, 국왕을 배반하고 모반을 일으킨 의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장장 6년에 걸친 영국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왕당파가 승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곧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이 등장하면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의회의 군대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국민에게 호소하며 폭넓은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국왕의 지지자들은 모두 영국국교회의 수호자들이었고, 의회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청교도였다. 이 전쟁은 흡사 종교전쟁처럼 보였지만 전쟁의 근본 원인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라의 최고 권력을 누가 장악하는가의 문제였다. 국왕인가.. 2024. 7. 18. [영국]#27_존 햄던 사건 이후, 하원을 무단침입한 찰스 1세 찰스 1세의 하원 무단침입 오늘날 런던을 방문하는 외국 여행객들은 고색창연한 건축물과 전통 의식에 깊은 인상을 받곤 한다. 특히 이 전통 의식의 배경에 전해지는 일화를 알게 된다면 더욱 의미심장할 것이다. 템스강변에 자리한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영국 의회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매년 영구 국왕이 의회를 방문해 연설할 때는 이곳에서 30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영국 전통의 독특한 의식이 거행된다. 먼저, 영국 국왕이 상원에 출석하면 검은 지팡이를 든 사절이 하원의원들에게 국왕의 출석을 알리고, 상원으로 건너와 국왕의 연설을 들을 것을 통지하기 위해 건너편 하원 회의장으로 간다. 하지만 사절이 하원 근처에 도착할 즈음, 하원의 경비병은 그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회의장 문을 걸어 잠근다. 그러면 사절은 하.. 2024. 7. 13. [영국]#26_찰스 1세, 영국내전의 전초전 영국, 내전의 바람이 불다 왕권의 본질에 반대하는 것은 곧 전제정치를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현대국가에서 정치적 기반이 되는 필수 요소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적은 수업료를 내고 고도의 정치적 실험을 한 셈이었다. 햄던 사건으로 국왕의 권위가 실추된 데다 고갈된 재정을 채울 길마저 막막해진 상태에서 찰스 1세는 또다시 전쟁에 휘말렸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만약 이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찰스 1세는 그의 아버지처럼 모든 책임을 후계자에게 물려준 채 조용히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전쟁은 바로 찰스 자신의 어리석음이 발발한 것이었다. 찰스 1세는 당시 청교도가 장악하고 있던 의회와 갈등하는 상황에서 장.. 2024. 7. 12. [영국]#25_찰스 1세와 영국의 권리 청원 찰스 1세 vs 의회, '권리청원' 찰스 1세는 왕권에 도전하는 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러고는 불법으로 상인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징수하고, 젠트리에게는 강제로 대출을 받게 하여 국채를 모집했다. 이에 의회의 반대파는 영세민의 조세저항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이렇게 왕권과 민권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영국 왕조 사상 가장 격렬한 비극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극의 주인공인 찰스 1세는 스스로 위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1628년, 조세저항으로 수세에 몰린 데다 재정까지 고갈되자 찰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하원은 의회가 소집되자마자 찰스의 이런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며 특단의 조처를 한다. 바로 국왕을 상대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보장한 '권리청원'을 제출한 .. 2024. 7. 11. [영국]#24_찰스 1세와 의회의 대립 찰스 1세, 왕위에 오르다 1625년, 찰스 1세는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젊은 국왕은 부왕의 명석함보다는 오히려 '왕권신수설'을 제창했던 부왕의 고집을 물려받았다. 그는 약간의 말더듬이에다가 매사 우유부단했지만, 왕권신수설을 통치방침으로 삼으면서 독단적인 군왕이 되었다. 찰스 1세가 '국왕의 권력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정치에 반영하면서부터 그와 잉글랜드는 일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 혼란은 찰스 1세가 처형된 후에도 몇십 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영국은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으며, 이 나라가 역사의 파도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을지는 국왕의 능력과 지도력에 달려 있었다. 결국 이 범선의 선장인 찰스 국왕이 국가의 운명을 .. 2024. 7. 9. [영국]#23_영국의 동인도회사 동인도회사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해상에서의 약탈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1587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명을 받은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영국 해군을 이끌고 스페인 함대를 습격했다. 해전을 벌이던 중 그는 스페인 국왕 소속 상선인 '산 펠리페 나포했다. 바로 그 배 안에서 동인도 무역에 관한 비밀문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바로 이 문건들이 1600년에 런던 상인들이 동인도 회사를 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해 엘리자베스 여왕은 동인도회사에 특허장을 발부하여 이후 15년 동안 동방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1608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인도에 상관(주로 외국인 경영하는 규모가 큰 상점)의 설치를 추진했다. 당시에는 무력으로 억누를 여력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주로 경제적인 수단을 이.. 2024. 7. 8. [영국]#22_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황금기 엘리자베스 여왕은 재위 중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 뿐 아니라 영국 역사상에서도 가장 민심을 사로잡은 통치자로 꼽힌다. 그녀는 오랜 재위 동안 한결같이 다양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했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신교도를 지켜주었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해상권 보호에도 적극적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네덜란드가 스페인에 대항하는 것을 지원함으로써 그 나라 국민의 자유까지 지켜준 셈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권위적인 군주였지만, 폭군도 전제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공인된 법률과 상식에 따라 나라를 통치했다. 여왕은 의회를 자주 열었으며, 말년에는 매년 소집했다. 엘리자베스는 대다수 사람, 특히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면서 사람들의 요구를 이해하고 정책에 반영하기도 .. 2024. 7. 7. [영국]#21_영국-스페인 전쟁의 이모저모(발달과정, 정치 및 경제적 효과, 종교적 의의) 영국-스페인 전쟁의 발단과 전개 전쟁이 발발한 것은 바로 신교 국가인 영국이 스페인의 제국 패권주의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네덜란드가 스페인에 대항해 싸우는 데 지원군을 보내 힘을 보탰다. 이에 분노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영국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영국해협을 횡단할 연합군을 대륙에 대기시킨 상태에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함대를 파견했다. 1588년 여름, 무적함대는 위용을 자랑하며 영국을 향해 출발했다. 펠리페 2세는 당연히 스페인이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예상이 빗나가버렸다. 영국 해군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아주 날렵하고 기동력이 뛰어났다. 당시 최고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순식간에 와해하여 북해로 쫓겨갔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던 육.. 2024. 7. 6. 이전 1 2 3 4 5 6 7 8 ··· 2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