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233 [일본 근현대사]#44_제1차 세계대전 후, 중국의 산둥반도를 차지하다 1914년 10월 말, 일본 군대가 갑자기 중국 칭다오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에게 총공세를 가했다. 이 전투에 영국군 1,000명도 참가했다. 11월 7일, 칭다오의 독일군이 투항함으로써 일본군이 칭다오를 관리하고, 독일의 전쟁 포로들은 도쿄 전쟁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속 일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유럽 협약국과 동맹국이 참전했는데,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본 정치계는 이 전쟁에서 한 줄기 빛을 봤다. 원로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 전쟁은 다이쇼 시대의 천우이다."라고 외쳤다. 일본 정부는 곧 참전 준비에 착수했다. 전쟁이 일본 경제에 큰 이익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열강의 간섭이 줄어든 틈을 타 동북아에서 본인들의 지위를 강화할 절호의.. 2024. 1. 16. [일본 근현대사]#43_일본, 조선을 삼키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조선을 삼키다 1905년 11월 16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방문해 '한일 협약(을사늑약)'을 고종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일본에 외교권을 넘겨 달라고 공공연하게 요구했다. 그는 외무대신을 만나 서둘러 일본 공사와 협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한 뒤, 18일 새벽 0시 20분 일본 헌병들의 경호를 받으며 거처에 도착했다. 약 30분 뒤,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조선의 박제순이 한일 협약에 서명했다. 일본은 조선에 통감을 설치하고 주둔해 외교를 총괄하도록 했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의 동의를 받지 않고는 그 어떤 국제 협약도 체결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한다.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한다. 그는 한국을 13도 11부 333군으로 나누고 각급 행정 기관에 .. 2024. 1. 16. [일본 근현대사]#42_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 본심을 보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에 도착했을 때, 러시아로부터 그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이때 영일 협상이 진전을 거두어, 이토 히로부미는 곧장 영국으로 가서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가 한반도를 손에 넣는 것을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러일전쟁 발발 영일 동맹이 러시아를 압박하자, 러시아는 같은 해 청나라와 조약을 체결하고, 1년 반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자국의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03년, 러시아가 갑자기 철군에 대한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동북 3성을 점령하는 것 외에도 외몽골과 중국 북부 지역 전체를 자국의 영향권 내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은 러시아에 강하게 반대하도록 청나라 정부를 부추겼다. 일.. 2024. 1. 15. [일본 근현대사]#41_중국의 의화단 운동과 러일전쟁의 조짐 [일본 근현대사]#40_일본의 청일전쟁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 [일본 근현대사]#39_청일전쟁 발발. 일본, 조선을 탐내다 구미 각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기 위해 제1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가 무쓰 무네미쓰의 계책을 받아들여 도 readmyworld.tistory.com 일본은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돌려주자, 더욱 특이한 병태적 심리에 빠져 군국주의의 바람이 점점 드세졌다. 이른바 '와신상담'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전 국민에게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전후 처리에 주력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일본은 러시아와 중국, 조선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중국의 의화단 운동과 일본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 입장에.. 2024. 1. 15. 이전 1 ··· 37 38 39 40 41 42 43 ··· 5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