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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238

[영국]#34_크롬웰의 생애와 크롬웰 관점으로 본 영국내전 크롬웰의 생애 1599년,  크롬웰은 잉글랜드 헌팅던의 평범한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며 청교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하자 대학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뒤 20여 년 동안 농사를 짓고 조세와 법률을 공부하며 지냈다. 이때까지 크롬웰은 전혀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열 명이 넘는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1628년과 1640년에 각각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영국 내전이 그의 운명을 바꿔 놓지 않았더라면, 크롬웰은 아마도 가난한 시골 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40세가 넘도록 단 한 번도 군인이었던 적이 없었기에 그때까지는 누구도 그에게서 군사 영웅의 기질을 발견.. 2024. 7. 26.
[영국]#33_크롬웰의 영국과 크롬웰 사후의 영국 청교도 금욕주의를 강요하다 한 영국 역사 연구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후, 크롬웰이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는 자신을 '호국경'이라고 칭했다. 국민들의 생활방식은 예전과 아주 많이 달라졌고, 너무도 많은 것들이 변해 버렸다. 크롬웰은 국민들이 모두 청교도 방식으로 생활하기를 원했다. 크롬웰은 모든 술집과 극장을 폐쇄하고 체육활동을 금지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크리스마스 축제를 금지하는 최악의 조처를 하면서 병사들에게 일반 가정집을 수색해 크리스마스 선물과 음식 등을 모두 압수하게 했다. 청교도가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만큼 청교도 방식의 생활은 잉글랜드를 매우 무미건조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크롬웰이 통치하는 5년 동안, 잉글랜드에는 체계적인 정치체제가 마련되었고 행정기구.. 2024. 7. 25.
[영국]#32_크롬웰, 영국의 호국경이 되다 크롬웰 집권하다 10여년간 전쟁을 치르며 새로운 이익집단으로 군대가 급부상하였다. 군대는 편히 앉아 탁상공론만 하는 의회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군대의 무력은 대개 그 권력의 기반이 된다. 군대는 자신들이 세금을 정하고 징수해서 고정적인 수입을 갖게 되기를 바랐지만, 곧 의회가 걸림돌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1648년에 크롬웰이 병사들을 보내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장로파 의원 140여 명을 의회에서 강제로 축출한 이래 의회에는 고작 90명의 의원만이 남아있었다. 이후에는 50~60명으로 대폭 축소됐다. 의회는 이렇게 몇 차례의 숙청을 거쳐 잔부의회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군대 편에 기울어 있던 크롬웰은 이 '골칫거리' 기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미 잔부의회는 '둔부 의회(영어로 '찌.. 2024. 7. 22.
[영국]#31_찰스 1세의 죽음 이후의 영국과 크롬웰 찰스 1세 처형 이후의 영국 찰스 1세의 머리가 땅에 떨어진 후,  한 소년이 그의 머리를 집어 들며 소리쳤다. "보세요! 반역자의 머리예요!" 이 장면을 목격한 어느 성직자는 비통함과 회한으로 가득 찬 글을 남겼다. "소년은 국왕의 존귀한 머리를 마귀의 머리처럼 집어 올렸다. 관중은 미친 듯이 아우성을 질러댔다. 마치 지옥에 온 것 같았다. " 국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 영국에 퍼지자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크롬웰 경이 군대를 장악한 뒤 의회를 압박하여 저지른 국왕 처형 사건은 민심을 잡진 못했다. 로렌스 에카드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부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른 것은 그들이 끝까지 국왕과 맞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국왕의 머리를 높이 쳐들자 군중 .. 2024.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