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무적함대
1588년 초, 리스본에서 영국 침공을 준비 중이던 스페인 함대 지휘관 산타크루스 후작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이미 리스본에 집결해 있는 상태였다.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130여 척의 스페인 함대가 모여 있는 리스본 항구의 당시 전경은 수많은 돛대가 마치 밀림처럼 보였고, 병사들과 선원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항구에는 군수 물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시도니아를 함대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시도니아는 해전 경험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그가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자 많은 사람이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시도니아 역시 장군이었고, 병사들은 그를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 함대의 계획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새로운 총지휘관인 시도니아는 행정전문가였기 때문에 인원 배치, 보급, 행정, 군수물자 등을 전부 정리해서 책자로 만들어냈다. 펠리페 2세는 시도니아가 만든 매뉴얼을 본인과 함께 만든 것이라 공표하며, 책을 출간하기까지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즉시 영국 전역에 전쟁 동원령을 내렸다. 영국 해군은 영국 해협에 제1방어선을 구축했고 육군도 방어 준비를 완료했다. 당시 영국에는 상비군이 없었기 때문에 민병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영국의 각 도시에서는 지역 수장들이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했다. 이들에게는 무기가 지급되었고,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기본적인 군사 훈련도 진행했다.
당시 유럽의 최강 스페인을 맞아 영국인의 애국심은 유례없이 고조되었다. 이에 여왕은 귀족들에게 기병에 필요한 말과 장비를 제공해 줄 것을 호소했다. 많은 영주의 아들들이 전쟁에 자원했고, 건장한 농장 일꾼을 뽑아 참전하게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런던과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서 2만 9,000명을 선발해 황제군을 조직했다.
영국은 템스강 하구에 너벅선(너비가 넓은 배)을 길게 연결해 벽을 만들고, 템스강 하구 모퉁이에 몰래 포대를 설치해 놓았다. 일단 스페인 함대가 방어선을 돌파하면 이곳에 밀집해 있는 포대가 영국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남부 해안선을 따라 1,000여 개 봉화대를 설치했다. 누구든 스페인 함대를 발견하면 봉화대에 횃불을 올리고 이것이 이어져 20분 안에 런던까지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무적함대 출격, 순탄치 않은 항해
1588년 5월 스페인 함대가 리스본 항구를 떠났다. 그러나 리스본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역풍의 습격을 받았다. 무적함대는 어쩔 수 없이 스페인 북부 라코루냐 항으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했다. 7월 펠리페 2세는 다시 함대 출항을 명령했고, 무적함대는 영국 해협에 집결했다.
스페인의 계획은 먼저 네덜란드 해안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팔마 공작의 군대와 연합 작전을 펴는 것이었다. 연합군 3만 명을 함대에 태워 영국 해협을 건너 영국 본토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함대는 또다시 역풍을 만났다. 게다가 지휘관 시도니아는 팔마 공작에게 도저히 약속한 시각에 맞춰 영국 해협까지 갈 수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1588년 8월 7일 밤, 무적함대는 프랑스 북부 해안 칼레, 케르크 항구를 지나던 중 드레이크가 이끄는 영국 황실 해군과 상선으로 이루어진 연합 함대를 만났다. 영국은 작은 배 8척에 화약을 잔뜩 싣고 불을 붙여 스페인 함대 대열을 공격했다. 스페인 진열은 곧 혼란에 빠졌고 각 함대의 선장들은 서둘러 닻을 끊어버렸다. 이 와중에 일부는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고, 일부는 함대 대열을 이탈했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몰
영국 군함의 원거리 대포는 적중률이 매우 높았고 속도도 매우 빨랐다. 반면에 스페인 군사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육박전만 생각하고, 갑판 위에서 창과 총을 들고 영국군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9시간 후, 영국 군함은 수많은 스페인 함대를 격침했다. 도망치다가 서로 부딪혀 침몰한 스페인 군함도 적지 않았다.
가까스로 도망친 스페인 군함은 또다시 보기 드물게 강력한 폭풍을 만났다. 이 거센 폭풍에 스페인 군함은 북쪽으로 휩쓸려갔다. 무적함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에는 스코틀랜드 해안까지, 남쪽 아일랜드 서부까지 표류해 간 것도 있었다. 가장 멀리 표류한 배는 심지어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 부근의 차가운 바다에서 침몰했다. 선원들은 배가 부서지자 버리고 황량한 무인도로 기어 올라갔다. 스페인 함대의 기함 역시 선체가 크게 손상되어 밧줄로 칭칭 감은 채 한 달 뒤 간신히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무적함대의 패배는 스페인에게 있어 극히 일부의 실패에 불과했기 때문에, 스페인은 여전히 막강한 국가였다. 하지만 이제 막 일어나기 시작한 영국은 이번 승리로 큰 자신감을 얻었고 이후 유럽의 절대 강자로 떠오르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때부터 위대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막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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