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2세 영면하다
펠리페 2세도 나이가 들자 궁전을 산책할 때 늘 그가 총애하던 에우헤니오에게 부축을 받아야 걸을 수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여전히 성실하고 엄격했지만 때때로 그를 괴롭히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596년 엘에스코리알 궁전에 매우 고통스러운 신음이 울려 퍼졌다. 늙은 왕 펠리페 2세의 병이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이럴 때면 그는 항상 궁전 안에 있는 가족묘로 가곤 했다. 대리석 조각상 아래 그의 아버지 카를 5세가 묻혀 있고, 그 옆에는 그의 어머니이자 포르투갈 공주인 이사벨이 잠들어 있었다. 또한 그의 세 부인도 이곳에 잠들어 있었으며 나머지 한 명인 메리 튜더는 이미 30년 전 런던에서 깊은 잠이 들었다. 펠리페 2세는 바로 이 무덤들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남겨두었다.
펠리페 2세는 죽기 50일 전부터 온몸에 고름이 생기고 짓무르기 시작했다. 그는 고통을 참지 못해 미칠 듯이 소리를 질러댔고 이는 듣는 이들까지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의 아버지 카를 5세는 말년이 되어 자신의 죄를 후회하고 반성했지만 펠리페는 그렇지 않았다. 1598년 펠리페 2세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스페인 황금시대의 최후를 의미했다. 왕위를 이어받은 펠리페 3세는 그의 아버지처럼 부지런하고 성실하지 않았다. 이 게으름뱅이 왕은 오직 향락을 즐기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골치 아픈 정치는 모두 총신에게 넘겨버렸다.
네덜란드와의 전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당시 스페인은 여전히 막대한 부채를 떠안고 있었다.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휘말린 스페인은 이 전쟁으로 인해 또다시 막대한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스페인은 광활한 영토를 바탕으로 발전하고 많은 영광을 누렸지만 그 영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로 인해 결국 엄청난 빚을 짊어지고 말았다.
예일 대학의 역사학 교수 폴 케네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역사적으로 분명 많은 일을 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을 공격했고 그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당시 스페인 군대는 매우 강력했지만 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부대는 유럽 영토를 지켜야 했고, 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 신대륙, 네덜란드 등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스페인 부대는 이제 막 적군을 물리친 후 다시 또 다른 적을 상대해야 했다. 프랑스와 막 전쟁을 끝내고 협정을 맺자마자 또다시 돌아서서 오스만 튀르크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지중해에 오랫동안 평화 무드가 자리 잡자 이번에는 대서양에서의 충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대서양 넓은 바다에서 유럽 서북부의 신흥 강대국과 접전을 치러야 했다."
"스페인이 가장 힘들었던 점은 동시에 세 군데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스페인의 수많은 적이 군사적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서로를 돕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정세를 비유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스페인은 수렁에 빠진 덩치 큰 곰"이었다. 이 곰은 주변의 어떤 사냥개보다도 힘이 강했지만, 혼자서 수많은 적을 동시에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결국 조금씩 지칠 수밖에 없었다."
아메리카로부터 끊임없이 유입되는 은은 대부분 전쟁 비용으로 충당되었다. 당시 네덜란드와 영국의 해상 약탈로 인해 스페인의 은 수입 항로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영국이 도버 해협을 가로막고 있어 스페인은 은을 플랑드르의 부대에 지원할 수 없었다. 본국으로부터 은이 도착하지 않아 군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플랑드르의 스페인 부대는 혼란에 빠졌다. 급료와 지급품이 제날짜에 지급되지 않자 군사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닷길이 막히자 스페인은 네덜란드로 은을 운반하기 위해서 육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육로로 운송하는 방법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해 제노바를 거쳐 노새와 말로 알프스산맥을 넘어 프랑스 콩테에 도착하는 길이 있었다.
- 또 다른 방법은 환어음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마드리드에 있는 플랑드르, 안트베르펜, 리안, 프랑크푸르트, 브장송 은행가와 제노바 상품 거래 시장의 은행가로부터 환어음을 발행받는 방법이다.
- 프랑스에 통행 허가를 받아 파리와 플랑드르로 은을 운송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통행세 명목으로 은 3분의 1을 요구했다.
아메리카로부터 유입되는 은의 행방
한편 플랑드르에서 환어음을 받자 지불한 은행가들은 스페인에 은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국왕이 은행가들을 통해 발행한 환어음이 너무 많아지자 플랑드르의 은행가들도 더 이상 바꿔줄 은이 없었고 결국 줄줄이 파산하고 말았다. 스페인 국왕은 물론 수많은 은행가가 아메리카의 은을 실은 배가 세비아 항에 도착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스페인에 도착한 은은 곧바로 다시 암스테르담, 브루게, 안트베르펜 금융시장으로 빠져나갔고 스페인에 남는 은은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아메리카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은은 오히려 스페인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은 유입량이 증가하자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면서 소위 가격혁명이 일어났고 더 나아가 스페인 농업과 공업을 무너뜨렸다. 16세기 스페인 황금시대에 스페인 인구는 급속히 증가했지만 식량 생산이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더구나 1560년대 자연재해가 일어나 식량 생산이 더욱 감소하자 스페인 중하층민은 기아에 허덕였다.
아메리카에 대한 환상은 수많은 스페인 노동 인구를 아메리카로 향하게 했다. 이들 중 대다수가 기사였으며, 그 외에 농장주, 수공업자, 왕실 관원, 상인, 성직자 등 스페인을 발전시켜야 할 핵심 세력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상당한 부를 축적한 이들은 생활이 풍요로워지자 유럽의 사치품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상류층이 필요로 하는 사치품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와 영국인들이 이 기회를 틈타 스페인의 대아메리카 수출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당시 공업품 생산을 주도했던 네덜란드와 영국은 스페인 대도시에 상업기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비야에서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메리카 수출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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