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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스페인] 스페인 제국의 몰락

by 티제이닷컴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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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제국의 몰락

 아메리카로부터 유입된 은은 스페인에 사치성 소비를 조장했으며, 인도 무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 세비야에서 관직을 사고 토지와 호화로운 주택을 사들였다. 이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부동산과 토지에 투자해 아메리카 무역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 카리브제도 사탕수수 사업과 진주 채취 사업 등에 투자했다.

 당시 세비야에는 특히 은그릇 제조업이 발달해 은 수공업자의 지위가 약재상인과 대등할 정도였다. 스페인 내에 남겨진 은은 대부분 은기 제작에 이용되었다. 네덜란드의 스페인 부대 총사령관 알바 공작이 1582년 죽을 당시 그의 집에 은접시 600개와 은쟁반 800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스페인에서는 그가 청렴결백한 관리로 알려져 있었다.

 1970년대 네덜란드가 북해에서 유전을 발견한 후 석유로 인해 갑자기 통화가 팽창하고 물가가 상승했다. 그 때문에 수출에 비상이 걸리고 결국 네덜란드 국내 모든 산업 생산력이 떨어졌다. 국내 상품과 서비스 수요가 증가하면서 주로 수출입 상품에 집중되어 있던 자금이 다른 소비 부문으로 흘러 들어갔다.

 현대 경제학자들은 훗날 이와 비슷한 현상을 '네덜란드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메리카의 막대한 은이 스페인에 유입된 후 나타난 경제 위기는 바로 이 '네덜란드병'과 유사한 것이었다. 수십 년 전 포르투갈에서도 향료 무역으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스페인의 은 유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은 유입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스페인의 제조업이 발전을 멈춤과 동시에 다른 나라의 제조업이 급속히 성장했다는 점이다. 15세기 중반 스페인은 북유럽에 1만 7,000개 양모를 수출했으나 16세기 초 북유럽에는 아일랜드 양모가 스페인 양모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스웨덴 철이 스페인 시장에 들어오면서 스페인 빌바오에서 생산되는 철은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다. 또한 아메리카의 실크도 스페인 시장에 들어왔고, 외국의 많은 기술자들이 스페인으로 몰려왔다. 제노바의 조선 기술자가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 자리를 잡았고 플랑드르의 디자이너들이 스페인 의류업에 진출했다. 프랑스인들은 주로 스페인의 유리와 실크 생산업에 진출했다.

 스페인의 대아메리카 무역의 6분의 5가 외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으로 채워졌다.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까지 카디즈에 있었던 84개 무역상사 중 스페인인이 경영하는 곳은 12곳뿐이었다. 그 외에 제노바인이 26개,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인이 18개, 프랑스인이 11개, 영국인이 10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7개를 소유했다.


스페인 무역의 현실

 스페인 황금시대의 국내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태평성세가 아니었으며, 생기 넘치는 분위기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당시 스페인은 오랫동안 가뭄이 지속되었다. 스페인의 중심 카스티야 지역은 특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슬람이 스페인 남부를 통치하던 8세기 동안에는 아라곤, 그라나다, 안달루시아에 완벽한 수리관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 수리 시스템은 정부에 의해 엄격히 관리 통제되었고, 전문 관리원이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극단적인 종교 주의로 인해 16세기 초 모리스코스들을 추방하면서 스페인의 농업, 특히 지중해 연안 농업이 급속히 몰락했다. 스페인 귀족들은 모리스코스들이 남기고 간 토지를 차지했다. 이들은 외지에 거주하면서 이 영토에서 세금만 거두어들였다. 수리 시설은 사유 시설이 된 후 거의 황폐해졌다. 스페인의 목축업 역시 각 지역의 길드 제재가 심했으며, 대부분 목장이 귀족의 소유가 되면서 목축업은 거의 발전을 멈추었다.

 스페인의 도로교통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스페인 경제 발전을 저해한 가장 큰 문제는 각 지역의 관세였다. 바르셀로나는 본래 지중해 무역 도시와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는 중요 항구였다. 하지만 목장주들이 단합해 카탈루냐인의 양모와 모직물 수출을 막고 메디나 델 캄포의 양모교역회와 카스티야의 무역 거래를 단절시킴으로써 쇠퇴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에는 본래 부르고스에서 세비야까지 아메리카로 수출하는 양모를 운송하는 지름길이 있었지만 이 길을 통과하려면 엄청난 관세를 부담해야 했다. 세비야 상인들은 종교적 제한으로 아메리카 무역에 필요한 자금을 대출받을 수 없었다. 이처럼 스페인에는 국내 상품 및 금융 거래를 제한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따라서 외국 상인들은 일반적으로 스페인 국내 교역에는 참여하지 않고 스페인의 대외무역에만 주력했다. 이들은 프랑스 브르타뉴, 영국, 네덜란드의 항구로부터 공산품을 수입하고 발트해에서 식량을 수입해 왔는데 이렇게 먼 곳에서 사 오는 것이 스페인 국내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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