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타니아,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다
기원후 43년,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BC 10 ~ AD 54)는 다시 브리튼을 정복하여 로마 제국의 속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54년에 카이사르의 군대가 브리튼 섬을 떠난 후, 거의 1세기가 다 되도록 로마는 내분으로 인해 브리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근 30년간이나 정복 전쟁으로 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 황제와 군인들은 오랫동안 참아온 정복욕을 해소할 대상이 필요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브리튼이었다. '브리튼 정복자'야말로 정복욕의 물꼬를 터줄 최적의 명분이었다. 그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로마 군대의 사명이라 여기고 브리튼 원정을 결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43년, 로마 군단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는 4만 대군을 이끌고 브리튼 정복에 나섰다.
로마 대군은 브리튼 섬에 상륙한 뒤 전열을 정비하고 곧바로 내륙으로 진군해 갔다. 하지만 브리튼족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진격이 순조롭지 않았고, 많은 사상자가 나는 큰 피해까지 보게 되었다. 로마군은 일단 브리튼의 주요 거점도시인 콜체스터를 점령한 뒤 지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부득이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템스강변에서 로마 군단과 합류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플라우티우스 장군이 콜체스터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콜체스터를 로마의 새로운 속주인 브리타니아의 수도로 선포했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가 성대한 개선 행사를 거행했다.
이후 지원부대까지 가세한 로마 군대는 결국 브리튼을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때부터 십수 년에 걸친 브리튼인의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그중에서도 이케니인(고대 잉글랜드 동부 켈트족의 한 부족)의 반란이 가장 격렬했다.
브리튼의 반란
원래 이케니인은 로마에 우호적인 부족이었다. 그러나 네로(37~68) 황제가 등극한 뒤 브리튼에 대한 로마군의 대량 학살과 파괴가 자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더욱이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에 협조했던 이케니의 속왕이 죽자 로마 관원들은 이케니인의 토지와 세금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폭정을 일삼았다. 심지어 속왕의 딸들을 겁탈하고 미망인인 왕비를 모욕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분노한 이케니의 부디카 왕비는 로마의 속주 총독이 브리튼을 비운 사이, 브리튼의 9개 부족을 규합하여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 복수심에 불타는 왕비의 군대는 야만적이고 잔학하게 돌변하여 침략자들을 피의 제물로 삼아 응징하고자 했다.
이들은 콜체스터를 습격한 다음 런던까지 진격했다. 분노에 찬 반란군은 성을 지키는 로마 군단을 전멸시킨 뒤 성안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런던 시장과 로마의 군사시설 등을 닥치는 대로 파괴해 버렸다. 고대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약 7만 명에 달하는 로마인과 로마화한 브리타니아인들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이 학살은 브리튼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고 잔혹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복자들이 자신들의 침략행위로 인해 뿌려졌던 피의 대가를 치른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후세 영국인들은 대체로 부디카 왕비의 반란에 대해 침략자에 저항하고 민족 반역자를 처단한 행위로 보아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윽고 로마는 대군을 집결하여 무장봉기를 진압하고 속주를 찾기 위한 대반격을 개시했다. 치열한 전투와 피의 보복이 자행되면서 이번에는 무려 8만 명에 달하는 브리튼인이 학살되었다. 여기에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부족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60년에 부디카 왕비가 독약을 마시고 자살함으로써 반란은 종결되었다.
로마 이후 수 세기의 영국
그 후 로마 제국의 하드리아누스(76~138) 황제는 브리튼에 대한 통치를 공고히 하고자 힘썼다. 122년, 브리타니아를 방문한 그는 갈수록 빈번해지는 스코틀랜드인의 공격과 접경지역에서의 반란을 막기 위해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축조하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133년에 약 117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이후 이 방어벽 넘어 북쪽으로 안토니우스 방벽이 축조되었지만, 실제적인 경계선은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고착되었다. 결국 로마 제국의 군대는 스코틀랜드까지 영역을 넓히지 못한 채, 410년에 이르러 브리튼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 300여 년 동안,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 미개한 땅에 로마 문명인 목욕과 그리스도교 문명인 세례가 잇따라 들어왔다. 로마 제국은 이곳에 문명의 흔적을 남긴 채 떠났지만, 그리스도교는 이후 역사에서 이 섬나라의 문명과 역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게르만족이 물밀듯이 침범해 들어오면서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낙후되고 원시적이었던 부족이 브리튼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바로 앵글족과 색슨족이었다.
장장 1세기 반 동안 이주가 진행된 끝에 6세기경, 오늘날의 잉글랜드 민족이 비로소 이 땅에 등장하게 된다. 앵글족의 땅을 의미하는 '잉글랜드'라는 명칭도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7세기 초, 브리튼은 '7 왕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 잉글랜드는 사분오열되어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명의 발전은 전에 없이 정체되고, 역사는 마치 침체의 늪에 빠진 듯했다. 하지만 문명의 불꽃은 깊은 곳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으며, 힘차게 부흥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에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이때를 가리켜 "브리튼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듯했지만, 잉글랜드에 여명이 밝아오던 시기였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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