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근대 과학의 발전
1785년, 영국에는 증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최초의 면방직 공장이 들어섰다. 1830년대 이후, 증기 동력은 면방직 산업에 널리 보급되었고 차츰 수력의 비중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의 선두에 섰던 면방직 산업은 또다시 증기 동력 기계를 도입한 최초의 산업이 되었다. 기계의 증기 동력화가 완성되면서 공장제도가 점차 확립되기 시작했다. 1840년이 되자 면방직 산업에 종사하는 공장노동자 수는 수공 노동자 수의 두 배를 넘어섰다.
와트 기관의 등장으로 인해 방직, 채광, 야금 등의 산업도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특히 와트 기관을 제작하는 기계제조업이 특수를 누렸다.
1812년에는 증기기관을 이용한 선박이 등장했고, 1814년에는 조지 스티븐슨이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차를 제작하여 시운전에 성공했다. 1825년, 전체 길이가 37마일에 달하는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부설되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철도로 기록된다.
와트가 제작한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의 지표가 되었다. 증기기관을 필두로 시작된 산업혁명이 수십 년간 지속되면서 영국에는 현대적인 산업 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영광을 역사 속에 우뚝 세우게 된 것이다. 전에 없는 대규모 산업 체제가 구축된 이후에는 강대국 간 패권 다툼의 법칙도 변화하게 되었다. 즉, 산업기술과 과학기술이 국가의 역량을 결정하는 중요한 관건으로 등장한 것이다.
후에 영국이 미국과 독일에 밀리게 된 것도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탓이다. 영국은 식민지의 거대한 시장독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 발전에 소홀하고 말았다. 산업혁명 후에는 식민지 쟁탈이 아닌, 산업과 기술이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게 된 것이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을 보면 과학기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증기기관이라는 혁명적인 기계를 발명할 수 있었던 것은 와트가 과학과 기술을 결합한 진정한 의미의 발명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역학, 수학, 화학을 철저히 연구하고, 실린더의 열효율을 정확히 계산해 냈다.
근대 과학이 탄생하기 전, 인류의 생산과 창조 과정은 모두 생산-기술-과학이라는 법칙을 따랐다. 즉, 경험에 의해 생산하고 지속적인 생산과정에서 기술이 축적되며,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과학이 탄생한다. 이는 아주 길고 완만한 과정으로서 변화하는 모습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이 방식을 통해 근대 과학이 탄생했고, 또 발전했다.
근대 과학의 탄생으로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인류의 세계관에 대하여
12, 13세기 중세 시대에, 서양에서는 온 세상이 인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최고작품이 인간이고,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따라서 인간이 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믿었고, 해와 달 등 여타 천체들도 지구의 주변을 도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무척 강한 신념이어서 세상의 모든 것은 인류를 위해 창조된 것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16, 17세기에 이르러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등이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이때부터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그저 태양 둘레에 있는 천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다는 의식이 확립되었다 이 관념은 인간 중심의 사고를 점차 약화했다. 17세기말,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18세기 초에는 우주에 태양계와 같은 항성 및 행성들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것이 발견되면서 인류는 우주의 중심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과학의 발전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역할
16세기말 영국에는 새로운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변혁은 항상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때에는 철학자들과 실천가들이 속속 출현했다. 그 배경은 바로 탐구 정신이었다. 해양 강국이었던 영국에서는 항해가와 항해기구 제작업자들이 이른바 '자연철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바로 이들 간의 교류로 인해 유럽에 새로운 사상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사상 중에는 실용적인 것도 있고, 추상적인 것도 있었다. 베이컨은 사물이 발전해 가는 모습을 감지해 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물론 창조적인 과학자는 아니었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낸 베이컨은 학자와 장인들의 대거 출현에 주목했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의 성과를 통해 그는 자연계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주도했다. 베이컨은 자신의 철학 체계 안에 모든 주변 사물을 반영할 만큼 훌륭한 조직가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자연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왕립과학학회의 탄생
당시 영국에는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두 개의 대학밖에 없었다. 런던에는 대학은 없었지만 당시 과학계와 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두 대학 역시 인적자원이 풍부하여 런던과 마찬가지로 과학 및 문화 활동이 활발했다. 17세기 초, 옥스퍼드 대학은 당시 베이컨 등의 자연철학자들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전 세계 지성인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출간된 데카르트의 저작을 탐독했다. 옥스퍼드에서는 영국 내 지식의 전당으로 비공식적인 연구모임이 조직되었다. 이것이 바로 1660년대 탄생한 왕립과학학회의 기초가 되었다.
'역사학 > 영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53_아이작 뉴턴과 과학혁명 첫번째 이야기 (0) | 2024.08.22 |
---|---|
[영국]#52_영국의 루너 소사이어티 그리고 증기기관차의 등장 (0) | 2024.08.21 |
[영국]#50_증기기관의 등장, 산업혁명에 박차를 가하다 (0) | 2024.08.19 |
[영국]#49_ 산업혁명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의 생애 (0) | 2024.08.16 |
[영국]#48_산업혁명이 태동하는 영국의 상황 (0) | 2024.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