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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19_메이지 유신과 세이난 전쟁(2)

by 티제이닷컴 2023.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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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신 원로들의 폭동을 제압하고, 처형하여, 규슈 지역은 오쿠보 도시미치 정부에 대한 민심이 박살날대로 박살 났다. 언제 반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가고시마에 특권을 주는 회유책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사족들의 반란을 줄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오쿠보 도시미치는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바로 같은 *유신 삼걸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통치력을 믿고 있었다. 그가 결코 경솔하게 반란을 주도할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유신 삼걸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그러나 가와지 도시요시는 치안 책임자로서, 가고시마로 사람을 보내 동향을 살피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의 무기고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운 사립학교 부근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구마모토와 하기성에는 반란이 일어난 후 정부는 그곳에 보관된 탄약들을 오사카로 운반해 오기로 결정했다. 과거에는 탄약을 운반할 때 범선을 이용했지만, 이번에는 증기선을 이용해 현청에 통보도 하지 않은 채로 야밤에 몰래 운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사립학교 학생들이 경시청에 보낸 정탐꾼을 잡아 심문한 후 경시청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1월 29일 고츠키가와 상류에 있는 소무타 탄약고를 습격해 탄약 3만 발을 탈취했다.

세이난 전쟁의 시작

 이제 정부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관계는 틀어질 대로 틀어지고 더 이상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877년 2월 다카모리는 결국 반정부 반란을 일으켰고 가고시마에서 구마모토를 향해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폭설이 쏟아지던 날, 사이고 다카모리는 육군 대장의 제복을 입고 검을 찼다. 그는 포대와 함께 반란의 여정을 나섰다. 규슈 각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지지하는 사족들이 잇따라 여정에 참여하였고, 이윽고 병력은 3만 명으로 늘어났다. 

 2월 12일,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고베에서 천황을 수행하여 순행하던 중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곧장 조정에 전갈을 보내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참사가 일어날 거라고 경고했다.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처음에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반란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25일 가고시마에서 보낸 정식 보고를 받고 나서야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기도 다카요시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가 전사한다 해도 미련은 없다"라고 말했다. 19일, 정부는 가고시마 진압을 선포했으며, 5만 군대와 군함 11척을 보내 전투를 벌였다. 세이난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 군대는 50일 동안이나 구마모토성을 포위했지만, 난공불락의 구마모토성은 사이고 다카모리 군대의 힘을 크게 소모하게 했다. 3월에는 정부군이 가고시마를 점령해 현령을 장악했다. 그전까지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옳은 줄 알았던 가고시마 시민들은 그제야 사이고 다카모리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알고 정부군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3월 19일 정부군은 사이고 다카모리 군대의 후방을 공격하여 포위된 구마모토성을 구해냈고, 반란군은 퇴각했다.

 1877년 5월에도 정부군과 반란군의 전투는 계속되었고, 정부 핵심 인사인 기도 다카요시는 이때 과로로 병석에 누웠다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8월, 노베오카 북부의 나가이무라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군대가 정부군에게 패배해 1만 명이 투항하고 반란군의 전면 철수가 시작됐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패잔병을 이끌고 가고시마의 시로야마까지 퇴각했지만, 머지않아 정부군에게 포위당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최후

 정부군의 총지휘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그에게 투항을 권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사이고 다카모리는 딱 잘라 거절했고, 9월 24일 새벽 4시에 정부군이 총공세를 펼쳐 사이고 다카모리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메이지 유신 일등 공신이자 세이난 전쟁의 주동자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결국 할복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세이난 전쟁 이후 정세

  정부는 이 반란을 제압하여 국가 권력의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한편, 오쿠보 도시미치 정부의 급진 개혁에 불만을 품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을 지지하던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나카에 조민 등은 세이난 전쟁 이후 저항 방법을 바꾸어 정당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후 반정부운동의 중심은 자유민권운동으로 발전한다.

 세이난 전쟁 이후 출현한 자유민권운동은 의회 제도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처음에는 국회 수립을 목표로 했었으나, 나중에는 의회 제도 수립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메이지 11년에 암살당했다. 자객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출신의 이름 없는 무사였는데, 당시 이런 무사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가고시마 폭도 출진도
가고시마 폭도 출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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