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도쿄에서 요코하마에 이르는 일본 최초의 철도가 개통했다. 많은 일본인이 개통기념식을 구경하기 위해 도쿄 신바시에 몰려왔다. 1874년에는 오사카-고베 철도가 건설되었고, 1877년에는 교토-오사카 철도가 개통되었다. 도쿄-요코하마 철도는 정부가 런던에서 100만 파운드의 공채를 발행해 건설한 것이었다.
일본 철도 산업의 발전
메이지 초기에 철도 건설을 지휘했던 이노우에 마사루는 훗날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메이지 초기에는 서양식 건축을 공부한 사람이 없었다. 철도 건설을 시작했을 때, 측량과 설계, 시공 및 기차 운전은 모두 외국인이 담당했다. 기수라고 불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이 외국 기술자를 따라다니며 일본인 노동자들과의 통역을 도맡아 했다. 당시 일본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토목공사를 담당했다.
메이지 10년 이후, 일본 철도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수는 120명에 달했는데, 그들 임금은 매우 높았다. 고베에서 기술생을 직접 양성하면서 일본인 전문 인력이 배출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점점 외국인 고용을 줄여나가며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교토-오쓰 철도를 건설할 때는 외국인이 고문으로 참여하되 터널, 교량 등의 설계는 모두 일본인이 담당할 수 있었다. 감리할 때도 외국인 전문가의 발언은 제한되었고 모두 일본인이 실시했다. 그리고 그 이후 건설되는 모든 철도는 모두 일본인이 시공에 참여하였으며 외국인은 고용하지 않았다. 기차 운전도 철도 부설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비중을 점차 늘려나갔다.
식산흥업 정책
활발한 인프라 확충을 기반으로 일본의 산업화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하기 전, 경제 업무를 담당한 오쿠마 시게노부는 국내외 무역 발전을 가장 중시하여 직접 통상사를 설립해 무역, 금융, 해운 및 상업을 관리했다. 1870년, 그는 대장성과 민부성 사이의 권력 배분을 둘러싼 분쟁을 고려해 공부성을 새로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상업 무역에서 근대 공업 발전 위주로의 전환을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
사절단이 돌아온 후,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부에 건의한 '식산흥업에 관한 건의서'에는 공부성이 관영기업을 설립해 철도, 광산 등을 위한 가공 및 생산을 담당하고, 공부성 예산의 무려 40퍼센트를 철도 분야에 쓰게끔 하며, 철도 건설 외에 채광, 제련, 기계 제조 등 3개 분야를 중심으로 근대화된 산업 체계를 수립하는 등의 방안이 포함돼 있었다.
오쿠보 도시미치가 건의서를 제출한 후, 정부의 체제도 조정되었다. 내무성과 대장성, 공부성이 삼위일체 된 지도 체제가 수립되었고,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가 각각 이 3개 성의 수뇌가 되었다. 대장성의 주요 임무는 산업 발전 자금 마련 및 분배이고, 공부성은 철도와 광산, 기계 제도를 담당했고, 내무성은 농업 장려와 목,축산품 및 농산물 가공을 주로 책임졌다.
중앙 각 성의 예산 중 이 3개 성에 대한 지출이 41퍼센트 가까이 차지했으며, 인력 또한 중앙 정부 전체 인력의 53퍼센트를 차지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정권이 식산흥업의 필요성을 얼마나 실감하고 있었는지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막부 시기부터 일본은 이미 공업 기업을 발전시키고 외국에서 설비를 수입한 바 있다. 당시의 기업들은 대부분 군수 기업이었다. 하지만 메이지 정권이 수립된 후, 막부가 설립한 이 대형 기업들을 인수하고 규모를 확장하여 근대화된 군공 생산 체계를 수립했으며, 이것이 훗날 도쿄와 오사카의 포병 공장과 츠키지 해군 공장, 요코스카 해군 공장 등 근대 군수 공업의 핵심 기업으로 발전해 육군성과 해군성에 귀속되었다. 메이지 초기에는 일본에 아직 독립적인 기계 제조 공업이 수립되지 않아 이들 군수 공장이 공업 및 광업 기업의 생산 설비까지 만들어야 했다.
오쿠마 시게노부의 건의로 설립된 공부성은 식산흥업의 중심 부서가 되었다. 나가사키 제철소와 효고 조선소는 선박 건조 외에도 농산물 가공 기계 등 100여 종의 기계를 생산했으며, 후카가와 분국에서 시멘트를, 시나가와 유리 제조 공장에서 유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정부는 광산에 대해 관유 정책을 실시해 막부의 사도, 이쿠노, 고사카(오늘날 오사카)의 은광과 미이케 탄광, 아난 구리광, 가마이시 철광 등 광산을 인수했다. 공부성은 서양에서 근대적인 광산 기계를 도입하고 기술자들을 대거 영입해 기술 혁신을 실시했다. 고사카 광산은 독일 전문가를 수석 엔지니어로 영입하여 제련법을 개혁해 생산량을 빠르게 증가시켰다.
일본 민간공업은 본래 사쓰마번이 설립한 가고시마 방직소가 유일했으나, 내무성이 설립된 이후에는 센쥬 나일론 공장, 히로시마 방사 공장, 아이치 방사 공장 등 근대화 공장들이 여기저기 설립되었고, 오쿠보 도시미치가 직접 모방직 공업의 발전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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