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산업화는 부족했던 인프라 확충을 바탕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일본으로 돌아온 후, 식산흥업은 정부의 당면 과제가 되었다. 오쿠보 도시미치 정권은 서구 열강들처럼 산업화에 온 힘을 쏟아붓기로 결정하고 과감한 개혁 정책을 단행했다. 1874년, 오쿠보 도시미치는 '식산흥업에 관한 건의서'에서 "국력은 국민의 빈부에 따라 좌우되고, 국민의 빈부는 물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된다. 물자의 많고 적음은 국민들이 산업에 주력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지만, 그 바탕에는 정부의 유도와 장려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깔려 있다."라고 주장했다.
토지세 개혁
메이지 초기 봉건 번주들에게 판적봉환을 명령한 직후, 세스현의 일개 현령인 무쓰 무네미쓰가 종전의 토지 측량법을 바꾸어 전국적으로 통일된 토지세를 시행하고 실물 납세를 화폐 납세로 바꿀 것을 건의했다. 당시 봉건 다이묘들은 전호(봉토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쌀을 납부하도록 했는데, 이로써 농민들은 경작만 아니라 납세를 위해 실물을 배로 운반해야 하는 어려움마저 겪고 있었다. 그러니 정부 역시 쌀값 파동으로 인한 타격을 감수해야만 했다. 또 다른 현의 현령이었던 마쓰카타 마사요시도 새로운 토지 측량법을 제안했지만, 지위가 워낙 낮았던 탓에 이 둘의 지위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토지세는 당시 일본 정부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식산흥업을 위한 자본도 토지세를 통해 마련할 수 있었다. 폐번치현이 실시됨에 따라 토지 문제의 중요성이 다시금 대두되었다.
1870년 7월, 집의원, 판관인 간다 다카히라가 유명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 건의서에는 구세제의 여러 가지 폐단을 열거하고 있었는데, 막부 토지 매매 금지령 폐지,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 허가, 토지 허가증 발급, 화폐 토지세 징수 등 일련의 방법들이 제시됐다.
당시 일본은 소농 경제 국가로, 농민들이 다른 직업으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여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재배 작물까지도 관리하에 있어서 자유롭게 바꿀 수 없었다. 또한 토지는 봉건 영주에게 귀속되어 있었는데, 이 건의서를 계기로 봉건 영주와 봉건 토지에 대한 제한이 철폐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폐번치현이 실시된 이후, 토지세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거세어졌다. 정부는 1873년 무쓰 무네미쓰를 대장성 조세관으로 임명했다. 1873년부터 1881년까지 8년 동안 전국 경지에 대해 단일 척도 단위를 적용하여 측량하고 임야와 전,택지를 답사하게 하였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다. 토지 경계를 확정 짓고, 상세한 지도를 제작할 수 있게 했으며, 각 토지를 측량하고 경계선을 그어 허가증을 발급하는 등 복잡한 수속을 진행해야 했다. 이 작업에만 3,700만 엔 이상의 정부 자금이 투입되었다.
토지세 개혁으로 인해 근대 토지 소유제가 확립되자, 봉건적인 생산 제도는 자연스럽게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로써 일본 농업이 근대화의 길에 올라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정부의 개간 장려까지 더하여 경지 면적이 16년 동안 22퍼센트나 확대되었다.
오쿠보 도시미치 정권이 수립된 이후, 내무성은 농업을 장려하고 신기술을 도입하는 등 여러 가지 실질적인 조치를 실시했다. 정부는 육종장과 나이토 신주쿠 농업 시험장을 설립하였다. 또한 박람회와 공진회를 개최하고 순회 교사를 파견해 선진 농업 기술을 보급했다. 1870년대에는 각지의 호농과 지주들이 자발적으로 농담회를 조직해 개량종자와 선진 농업 기술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1881년, 정부는 전국적으로 120명의 노농을 소집해 전국 농담회를 개최했다.
일본 농업사에서도 이 시기를 '노농 시대'라고 일컫는다. 일본 정부는 이들 노농을 이용해 쌀, 보리, 과수, 채소 등의 우량 품종을 선택하여 보급했다. 이 밖에도 경제 작물, 특히 뽕과 차, 면화, 사탕수수의 재배가 급속히 늘어나 누에고치 재배와 방직 산업 발전에 속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벼와 같은 주요 양식 작물 생산량도 많이 증가했다. 토지세 개혁 이후 쌀이 상업화가 되면서 도시에 대한 양식 공급은 꾸준히 늘어났다. 메이지 초기부터 일본은 양식 수입을 중단하고, 수출에 나섰다.
이같이 토지세 개혁과 식산흥업이 활발히 추진되는 가운데, 신체, 거주,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리게 된 농민들은 도시로 대거 이주한다. 이로부터 도시 상공업에 값싼 노동력이 유입되면서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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