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삶아서 익히지 않은 명주실)는 일본의 주요 수출 품목으로, 오랫동안 총수출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효자 상품이었다. 당시 들여올 게 많았던 일본은 외국과의 무역에서 만성 적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생사가 외화 수입을 벌어다 주는 몇 안 되는 품목이었다.
메이지 유신 초기, 면직물 산업
그러나 메이지 초기에 기술이 낙후되고 런던에서 막대한 양의 일본 생사가 조악한 품질로 인해 폐기되는 사건이 일어난 후, 일본 생사의 명성은 급격히 하락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프랑스인들을 초빙해 관영 생사 공장을 건설하고 프랑스로부터 기계와 증기선을 도입했다. 이 공장이 건설되자 정부는 전국에 있는 사족의 아내와 딸들에게 모두 이 공장으로 와서 기술을 배우도록 하여 신기술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데 힘썼다.
4년 동안 2,000여 명의 여공이 프랑스 기술자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1873년 이후, 정부는 도쿄 제사 공장과 신마찌 제사 공장을 건설해 일본 제사 산업의 모범 공장으로 삼았다. 같은 해인 1873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후쿠오카현에서 생산한 생사가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한 생사와 거의 동급의 품질로 인정받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메이지 유신 초기에는 서양의 면직품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입되어 한 해 총수입액 중 4분의 1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된 기계 면방적 공업을 발전하기로 결정했고, 아이치 방적 공장과 히로시마 방적 공장을 설립했다. 당시 외국의 면사를 추방하기 위해 일본에 250개의 방적 공장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 위해 내무성은 창업 자금으로 영국으로부터 방적 기계를 사들여 개인 자본가에게 판매함으로써 일본 전역에는 민영 방적 공장들이 대거 생겨났다.
1873년, 일본은 프랑스로부터 무늬 방직이 가능한 방직 기계를 도입해 생산효율을 3배나 높였다. 또한 5년 후에는 이 방직 기계를 본떠서 자체 제작한 방직 기계를 만드는 기술력을 얻었으며, 오스트리아로부터는 면방직 전용 기계를 도입해 각지로 보급했다.
메이지유신, 통신 분야
근대화의 중요한 인프라 중 하나인 통신 분야 역시 메이지 초기에 빠르게 발전했다. 우편 사업은 처음에는 정부가 직접 운영했지만, 1871년 근대 우편 제도가 제정되면서부터는 도쿄, 교토, 오사카 사이에서 정식으로 우편물 운송이 시작되어 이 서비스를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또한 우편물 역시 처음에는 편지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우편엽서와 신문, 잡지 등의 수도 빠르게 증가했다.
또한 공부성은 1870년부터 전보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1873년에는 전국에 24개 전보국을 설립했고, 1878년에는 철도를 따라 전보국을 설치했다. 1880년에는 전보망이 일본 전역에서 개통되어 전국 주요 도시에서 전보 교류가 가능해졌다.
1876년 미국의 벨이 전화를 발명했고, 이듬해 일본에도 전화가 도입되었다. 1888년 이전에는 전화가 주로 정부 기관과 경찰, 사법부 등의 공적이 업무에만 사용되었다. 일부 광산에도 전화선을 매설해 전화선 매설 거리가 총 1,852킬로미터에 달했다. 또한 1889년에는 도쿄와 아타미 사이에 공중전화가 개통되었고 전화 가입자도 매년 20~30퍼센트씩 빠르게 증가했다.
초기 산업화 단계
1881년 말, 사쓰마 출신의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대장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메이지 중기에 16년간 정부의 재정을 담당하면서 '마쓰카타 긴축 재정'이라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을 남기는 인물이었다.
그가 대장경으로 임명되었을 때, 일본 경제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 이 인플레이션은 메이지 정부가 인쇄 기계 개발을 위해 불환지폐(정화와 바꿀 수 없는 지폐)를 대량으로 발행함으로써 초래된 인플레이션이었다.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후에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전반적인 상황이 심각했다. 정부 재정 수입의 실제 가치가 절반으로 뚝 떨어지고, 민간 부분에서도 공채 이익과 양로금, 기타 일정 수입으로 생활을 유지하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자와 물가가 폭등하고 공채 가격이 폭락했다. 물가도 폭등했다. 물가가 널뛰기하자 상인들은 투기를 통해 폭리를 취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고, 거액의 투자가 필요한 대규모 공업은 높은 이자 때문에 아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지출을 줄이고 수입을 늘려 화폐 유통량을 줄이면서 세목을 늘려 정부 재정에 숨통을 틔웠다. 정부의 재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자 태환지폐(정화와 바꿀 수 있는 지폐)를 발행해 회수된 지폐를 모두 폐기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5년 후에는 화폐 유통이 정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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