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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27_<학교령 반포>메이지 유신, 교육제도를 수정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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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7년, 문부성 관리이자 저명한 학자인 니시무라 시게키는 제2 학구를 시찰한 후 교육 제도를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절대다수의 소학생이 1~2학년만 마치고 자퇴하고 있던 것이다. 농민들은 학비 부담과 일손 부족 등을 이유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있었다. 또한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 대다수가 농민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무관한 개념들이 많았기에 농민들은 새 학교가 실용적인 것을 가르쳤던 과거의 데라코야보다도 못한 것으로 치부하곤 했다.

학제령 폐지

 학제령은 시행 7년 만인 1879년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교육령'이 반포되었다. 새 교육령은 다나카 후지마로와 미국인 고문 데이비드 머레이, 이토 히로부미가 미국식 자유 교육 사상에 근거해 제정하였다. 중앙 집권을 주장하는 프랑스의 교육 제도와는 달리 미국식 교육 제도는 지방 분권과 자유를 중시했다. 따라서 학구제를 폐지하고 촌마다 공립 소학교를 설립했다. 4세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이 4년 동안 1년에 4개월만 학교에 다니면 되는 제도였다. 이 명령이 반포된 후, 대중 교육을 장려하던 관리들은 교육 자유화에 강력히 반대했다. 교육권을 지방으로 이양하는 데 반대하는 대중들도 꽤 있었다.

 1880년, 천황의 시찰을 수행한 신임 문부경 고노가 천황에게 시찰 보고서와 함께 교육령 개정 방안을 제출했고, 문부성은 이 개정안을 바탕으로 소학교를 4-4제에서 3-3-2제로 바꾸었다.

 교육령을 개정하고 있을 때, 천황의 시독(왕이나 동궁 앞에서 학문을 강의하던 사람)인 모토다 에이후가 천황의 친정을 추진할 목적으로 유학으로 복귀하여 국가의 고유한 도덕 윤리로 다음 세대를 교육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천황의 의견을 기록한다는 명분으로 '교학대지'를 작성해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내 의견을 구하며 문명개화를 비판하고 사회 개혁이 과도하게 유럽식으로 편향되고 있음을 질책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반응은 신속했다. 그는 정치와 교육을 분리하고 과학을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교학대지가 세계 조류에 부합하는 우수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교육령에 반대하는 이유는 도덕 교육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882년, 프랑스 파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 교육 정책을 시찰하고 돌아온 모리 아리노리를 만나 헌법을 시행한 이후의 교육 정책에 관해 토론했다.  모리 아리노리는 독일의 국가주의 교육 사상을 도입해야 한다며 이토 히로부미 견해에 동의했다.

학교령 반포

 1885년, 일본에서 내각제가 시행된 후, 초대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가 모리 아리노리를 초대 문부대신으로 임명했다. 1886년, 국가주의 교육체제를 확립한 '학교령'이 반포되었다. 학교령은 '제국대학령'과 '사범 교육령', '소학교령', '중학교령'으로 구성되었다. 학술 연구와 교육을 분리하여 대학은 국가 발전과 관련된 학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중학교와 소학교에서는 국가에 충성하는 신민을 양성하는 교육 기관으로 정의했다. 국가주의 사상에 근거해 일반 중학교에서 고급 중학교, 최종적으로 제국 대학에 이르는 학교 체제를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1877년, 공부성은 공학료를 공부성 직할의 공학 교육 기관인 공부 대학교로 바꾼다. 그리고 1869년, 문부성은 정부가 막부로부터 인수한 쇼헤이 학교와 가이세이 학교, 의학교를 합병한 뒤 도쿄 대학을 설립해 일본 근대화의 중심으로 삼았다. 1890년까지 정부는 전체 교육 경비의 40퍼센트를 도쿄 대학에 투자해 도쿄 대학을 일본 최고의 대학으로 육성했다. 그 후 1897년에는 교토 제국 대학이 설립되었고, 20세기 초에는 도호쿠 제국 대학과 규슈 제국 대학이 설립되었다.

 당시 모든 제국 대학에는 공학부가 있었는데, 공학부란 서유럽의 공학 지식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기관으로 대부분 외국어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서양에서 아직 공학 체계가 형성되기도 전에 일본 대학은 서유럽의 성공한 경험을 본받아 공학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전민교육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기술 인재 양성과 지식 전수가 자연스럽게 실현되었다. 실제 산업 발전에 있어서는 중급 기술 인력 양성을 위주로 하는 고등공업학교가 일본 산업화에 대학의 공학원보다도 더 크게 기여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제적 여건이 안 되는 학생들은 고등공업학교로 진학했는데, 이들의 실력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다.

 메이지 연간에 대학 공학부 졸업생들은 대부분 관청의 기술 인력과 학교 교사, 대기업 기술자로 취업했고, 고등공업학교 졸업생은 민간기업의 핵심 기술 인력이 되어 서양의 현대 기술을 적극 도입해 산업화의 기초를 다지는 데 일조했다. 고등공업학교가 배출한 인력의 수 역시 대학 공학부를 크게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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