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26_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메이지 유신

by 티제이닷컴 2024. 1. 3.
728x90
반응형

 1874년, 사족의 반란이 정부의 과감한 '군국 정치'에 의해 진압되고 나서 오쿠보 도시미치가 반란의 주동자인 에토 신페이를 심문했다. 그는 한때 함께 활동하던 동지의 변론을 듣고는 그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에토의 추태가 그야말로 우스울 따름이었다." 나흘 후, 에토 신페이는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때 일본 전역의 대학교와 중학교, 소학교에서는 여전히 에토 신페이의 주도로 제정된 학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에토 신페이는 1871년 7월 새로 설립된 문부성(우리나라 교육부 같은 역할) 대보로 임명되어 교육 행정을 맡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착수한 사안이 바로 일본 전역에 있는 학교의 학제 통일이었다. 

메이지유신 이전, 막부 시대의 교육


 일본은 막부 시대부터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다. 주요 교육 기관은 사숙이었다. 사숙은 유명한 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설립한 교육 및 학술기관으로, 요시다 쇼인이 1856년에 설립해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배출해 낸 마쓰시다 사숙이 비교적 유명했다. 양학자인 오가타 코안이 1838년에 오사카에 설립한 사숙에서도 후쿠자와 유키치 등 3,000여 명의 학생을 배출했다. 또한 번마다 번교를 설립하여 근대 과학을 연구했으며, 이곳은 사족만이 학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에도에 있는 막부 직속 학교는 '쇼헤이자카 학문소'로 막부 관리와 각 번의 우수한 무사들에게 주로 유학을 교육했으며 이곳의 교육 과정은 각 번 번교의 본보기가 되었다.

 농민과 수공업자, 상인 이들 3개 계층은 위에서 말한 세 학교에 입학할 수 없고, 데라코야에만 입학할 수 있었다. 데라코야는 일반 평민들을 위해 설립한 학교로 우리나라의 서당과 비슷한 역할이었다. 주로 7~8세 아이들이 이곳에 다녔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실용적인 내용을 교육했으며 학생이 장래에 희망하는 직업에 따라 학습 내용이 바뀌었다. 일반적으로는 쓰기, 읽기, 작문, 주산, 예의범절 등을 과목으로 개설하였다. 도시의 경우 주로 관리와 의사, 상인이 설립하였고, 농촌의 경우에는 촌장과 신관, 승려가 대부분 설립자가 되었다. 데라코야는 메이지 유신 이전에 이미 도시와 농촌에 널리 보급되어 그 수가 1만여 개에 달했다.

메이지유신 학제령 시행


 1871년 12월, 에토 신페이가 학제 조사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모두 12명의 학자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10명은 양학자이고, 국학자는 단 2명뿐이었다. 이들은 6개월 동안 영국, 네덜란드, 미국, 독일의 교육 제도를 연구한 후 1872년 6월에 방대하고 완전한 국민 교육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학구, 학교, 교사, 학생, 고시 5대 부문으로 나뉘고 총 109장의 규정으로 이루어졌으며, 1873년에는 해외 유학생과 전문학교 관련 규정 등이 추가돼 총 213장으로 늘어났다.

 학제 초안은 프랑스의 교육 제도를 본떠 만들어졌으며 전국을 8개 대학구로 구분하고, 각 대학구마다 1개 대학을 설립한다는 내용이었다. 각 대학구 산하에는 32개의 중학구를 두고, 전국에 총 256개 중학구를 두어 각 구마다 1개 중학교를 세운다. 또 각 중학구에 210개 소학구를 두어 전국에 5만 3,760개 소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인구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인구 600명 당 소학교 1개, 13만 명당 중학교 1개꼴인 피라미드형 체제였다.

 학제의 기본인 소학교는 6세 아동부터 입학이 가능하였고, 상급과 하급으로 나누어 각각 4년씩 공부한다. 각지의 상황에 따라 유아원, 사숙 소학, 빈민 소학, 촌락 소학, 여자 소학 등을 설립할 수 있다. 중학교 역시 상급과 하급으로 나누어 각각 3년씩 6년제이다. 보통 중학교 외에도 공업 학교, 상업 학교, 번역 학교, 농업 학교, 장애인 학교 등을 설립할 수 있었다. 대학교는 고급 학문을 교육하는 학교로 교육 경비가 학비와 민간 부담금, 국고 위탁금으로 나뉜다. 일본 유명 역사학자인 시노부 세이자부로는 "문부성이 1872년에 제정한 학제는 계몽주의에 입각한 훌륭한 학제이다."라고 평가했다.

 1872년 6월, 이 초안이 처음으로 태정관 회의의 심의에 부쳐지자 거의 모든 부의 책임자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태장대보인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 계획이 너무 방대하며, 당시 일본 상황에서 모든 데라코야를 폐지하고 전국적으로 8년제 소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또한 당시 일본 재정을 고려해 봤을 때 이 계획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기에 학제 반포가 계속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법경이었던 에토 신페이가 참의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이 초안을 통과해야 함을 강력히 주장하자, 문부경 오키 다카토도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함께 거들었다. 결국 그해 8월, 메이지 정부의 교육 개혁 방안인 '학제령'이 반포되었다.

 이 명령은 강제성을 띠었다. 일부 현에서는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활용했다. 소학교 학생들에게 금속으로 만든 '취학패'를 몸에 달게 하거나 교기와 반기를 나누어주고, 현의 관리들이 학교를 직접 찾아가 우등생에게 상을 주기도 했다. 또 일부 현에서는 경찰을 동원해 아이들을 강제로 등교하게 하고, 오전 8시와 오후 3시에 취학 연령의 아이들이 길에서 놀고 있으면, 모두 잡아다가 강제로 학교로 보내기도 했다. 학제령이 시행된 지 7년 만에 소학교는 2만 8,025개, 교원의 수는 7만 1,046명, 소학생 수는 230만 명으로 늘어났다.

에토 신페이
메이지 유신 초기, 학제를 정리한 '에토 신페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