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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28_메이지 유신, 도쿄 대학 설립

by 티제이닷컴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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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노우에 고와시는 문부대신으로 재직한 1890년부터 1894년까지 일본의 산업 발전과 직업 교육을 위해 '실업 보습 학교 규정'과 '도제 학교 규정', '실업 교육 국고 보조법', '간이 학교 규정'을 제정했다. 이들 법안은 근대 산업 기술의 기본 지식과 기술을 지닌 기술 인재와 노동자를 양성하는 데 법률적인 기초를 제공했다. 1894년에 열린 제6회 의회에서 이노우에는 "포화가 없는 경쟁이기는 하지만, 지구상의 각국이 기술과 제조, 무역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라도 태만하면 나라의 부강과 운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법률적인 지원 아래 메이지 중후반에는 직업 교육 체계가 형성되기도 했으며, 일본 제조업의 발전에 탄탄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1900년 일본은 소학교의 학비 제도를 폐지하고 4년제 의무 교육을 시행했다. 1907년에는 이를 6년으로 연장했다. 1908년 아동 취학률은 97퍼센트까지 증가했다.

 1872년 학제 통과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수십 년 후 '개국 50년 사'라는 자신의 저서에 "유신 이전에는 교육이 40만 명의 무사들에게만 국한되었지만, 유신 이후에는 모든 국민에게 보급되었다."라고 말했다.

교육과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일본이 국가적으로 현대화를 시작했음을 상징한다. 일본이 일찍부터 현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전에 교육을 보급했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부터 정부와는 특별한 관련 없이 일본 민중들 스스로가 교육을 보급했다. 다시 말해 정부 주도가 아니었다. 그 당시 한국이나 중국은 정부가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가 있어서 교육 보급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일반 백성들에겐 학문은 특수 관료 계층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본은 과거 제도는 없었지만, 일반 백성들이 학문은 관리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고 교육에 더 이바지하였다.

 막부 말기 일본에 주재한 적이 있던 한 영국 공사는 "일본이 다른 분야에서는 영국보다 한참 뒤처져 있지만, 교육만큼은 영국보다 앞선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영국은 세계 제일의 패권국이며 가장 산업화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의 공사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메이지 시대에 많은 외국인들이 일본을 시찰했는데, 그들의 공통된 의견이 바로 일본의 식자율이 놀라울 정도로 높다는 것이었다. 메이지 시기에 일본은 이미 의무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의무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일본에 교육이 보급된 것으로 지레짐작할 수 있지만 실제는 정반대였다. 에도 시대부터 이미 일본의 일반 민중들 사이에 이미 교육이 보급되어 있었고, 이 기초 위에서 의무 교육 제도가 실시된 것이었다.

 1904년까지 이 시기, 일본에서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90퍼센트가 소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소학교가 4년 제이고, 또 많은 사람이 중도에 자퇴하기는 했지만, 농촌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90퍼센트가 소학교에 진학했다는 것은 당시로는 엄청난 숫자였다. 이렇게 교육을 중시하는 것은 일본의 큰 특징인데, 한 예로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에서도 결식아동이 많이 생겼다. 도시락을 싸지 못하는 학생들이 늘어난 걸 의미하는데, 당시 먹을 것도 없는데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교육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도쿄 대학 설립

 메이지 시기 일본은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큰 노력을 쏟아부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당시 도쿄 대학은 국가의 엘리트 양성이라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특히 메이지 시대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시기에 서양 학문을 도입하고 현대 교육을 시행했다. 그리고 외국인 전문가를 초빙하기도 했다. 또한 도쿄 대학에 재정적으로 상당히 많은 투자를 했고, 인재를 양성할 교사들도 많이 배출해 전체적으로 대학 지식수준이 향상되었다.

 일본은 도쿄 대학 외에도 교토 대학을 설립했고 뒤이어 다른 지역에도 하나하나 대학을 설립해 나갔다. 모두 국립 대학이었다. 재정적으로도 도쿄 대학에 대한 지원 규모가 가장 컸다. 그러나 도쿄대는 대학 규모 자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실질적인 지원은 공평하게 이루어졌다. 

 교토 대학 설립 이전에는 도쿄 대학이 유일한 대학이었으므로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도쿄 대학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교육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에 도쿄 대학이든 다른 분야에 대한 교육이든 모두 중요하게 여겼다.

 일본은 자원이 부족한 나라다. 스웨덴처럼 숲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며 중동처럼 석유가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일본은 인력 수준을 높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본이 교육에 투자한 것 역시 과학 기술과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일본이 가야 할 다른 길은 없었다.

도쿄 대학의 상징, 야스다 강당
도쿄 대학의 '야스다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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