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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30_근대 헌법 제정, 메이지 유신

by 티제이닷컴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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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천황이 신임하는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을 때, 그 앞에 놓인 가장 큰 문제는 나날이 고조되고 있던 민권 운동이었다. 자유 민권 운동은 민권을 확보하려는 자산 계급 운동으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자마자 일본 정치계에서 주요 세력을 형성했다. 그것은 메이지 유신의 필연적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헌법 제정과 의회 설치를 주장한 자유 민권 운동은 1870년대에서 1880년대에 이르는 세월 동안 헌법 제정을 실현하게 한 외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일본의 자유 민권 운동


 동양의 비스마르크를 자처해 온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제정이라는 역사의 막중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의회 설치, 여론을 존중하는 개명 정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메이지 초기, 정부는 아오키 슈조에게 헌법 초안을 작성하도록 하고, 군민공치, 군권 제한, 국민의 지위 상승이라는 원칙을 제시했다. 1875년, 천황은 '입헌 정체를 세운다'는 내용을 가진 조서를 발표했다. 원로원과 대심원을 설치해 각각 입법과 사법을 책임지게 하여 점진적으로 국가의 입헌 체제를 수립하기로 했다.

 그 후 전직 관료인 재야인사들도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1874년에는 정한론으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났던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 8명이 공동으로 '민선의원 설립 건의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민선의원 설립과 헌법 제정을 주장했다. 이로써 전국적으로 자유 민권 운동이 확대되었고, 1880년 3월에는 통일 조직인 '국회 기성동맹'이 설립되었다. 일본 각 민권 조직은 20여 종의 헌법 초안을 제시했는데, 영국식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는 단체도 있었고, 루소의 천부인권을 원칙으로 삼고 주권 재민과 군권 제한을 실시하는 것을 역설하는 단체도 있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궁정파도 자유 민권 운동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정부를 압박하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시의적절한 대책을 일러준 적이 있었는데, 헌법은 반드시 '흠정 헌법'이어야 하며 천황이 통치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부분은 궁정파의 주요 주장과 부합하였다.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는 민권 운동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천황제를 수호하기 위해 궁정파와 타협했다. 그러나 정부 내각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오쿠마 시게노부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일어났다. 결국 메이지 14년(1881년)에 정변이 발생한다.


흠정 헌법
 군주 국가에서 전제 군주가 군주의 권력을 유보하고 국민의 권리나 자유를 일부 인정해 주는 헌법으로, 군주가 단독으로 제정했다. 혁명에 의하지 않고 전제 군주제로부터 입헌 군주제로 이행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 내용은 나라에 따라 다르나, 일단 근대 입헌주의의 여러 제도를 채택했다고 하더라도 통치 기구의 민주화나 기본적 인권 보장 등이 불충분한 점은 마찬가지였다. 1814년 프랑스 루이 18세의 헌법, 19세기 초 독일 제국의 헌법, 그리고 일본의 메이지 헌법이 그 예시에 해당한다.

 

이토 히로부미 제헌권을 장악하다


 의회 설립과 헌법 제정 문제에 있어서 이토 히로부미는 점진파를 대표하고, 오쿠마 시게노부는 급진파를 대표했다. 1880년, 이토 히로부미는 우선 원로원을 강화한 후에 의회를 설립해 천황이 통치권을 독점하는 흠정 헌법을 제정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오쿠마 시게노부는 흠정 헌법 제정에는 동의하지만, 천황이 대권을 독점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영국식 정당 내각 체제를 수립해 내각을 구성하고, 2년 후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선출해 그 이듬해 의회를 소집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바로 이때, 사쓰마 출신의 홋카이도 개척 사관인 구로다 기요타카가 정부 재산을 싼 가격에 동향 출신의 정치상인 고다이 도모아쓰에게 팔아넘기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미쓰비시도 홋카이도의 해운권을 독점하기 위해 간사이 상회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쓰비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오쿠마 시게노부가 이 소식을 신문사에 알리자, 여론의 화살이 일제히 정부의 부패로 쏠려 사건이 점점 더 확산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센쥬 기차역에서 순행 중인 메이지 천황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자, 천황은 오쿠마 시게노부를 야심을 품은 간신이라고 생각하고 파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의회 소집 시기는 메이지 23년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제헌 대권을 장악한 이토 히로부미는, 본격적으로 점진적 제헌 계획을 진행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식 헌법 제정을 모델로 했다. 그는 1882년에 독일을 방문해 1년 넘게 독일의 헌법 제정을 연구했었다. 그는 권위 있는 헌법학자인 그나이스트에게 헌법을 배웠다. 그나이스트는 특별히 매주 세 차례씩 조수를 보내 이토 히로부미에게 헌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비엔나 대학의 슈타인 교수는 그에게 영국, 프랑스, 독일 정치 체제의 역사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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