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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35_메이지 헌법, 독일 헌법을 모방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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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헌법에 묻어난 일본 색채

 메이지 헌법은 주로 유럽 각국, 특히 입헌 군주제의 색채가 강한 독일 헌법을 참고로 하여 제정되었다. 독일은 유럽에서 군국주의가 가장 강했고, 입헌 군주제와 강한 군사력 그리고 기독교가 주요한 국가적 특징이었다. 이러한 독일의 성격은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독일 헌법을 모방해 메이지 헌법을 수립한 후, 특히 1920~30년대에 이르러 자국 고유의 전통을 국민들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가 메이지 천황을 매우 대단한 인물이라 선전한 것도 한 예이다.

 일본의 전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일본은 자국의 필요에 의해 메이지 헌법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나라든 자국 헌법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기는 하지만, 1920~30년대에는 헌법 조항 가운데 일본의 전통적 부분을 부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당시 일본 교과서를 보면,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당시 일본 헌법 전문가들이 세계 각국의 헌법을 자세하게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헌법에 이런 연구 결과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헌법 제정에 착수했을 때만 해도 국제적인 추세를 고려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외국이 어떤 상황인 지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세계의 공통된 이념을 무시했던 것이다.


왜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 헌법을 채택하였을까

 당시 사회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화하느냐'였다. '이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야 할까?' 당시 일본인들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기에 본보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건 선진국이었던 유럽을 돌아보며 일본과 가장 유사한 모델을 찾는 것이었다.

 일본은 경제가 가장 발전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영국을 보며 훗날 영국과 같은 강대국이 되길 머릿속에 그렸다. 하지만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이때 일본인들의 눈에 띈 것이 바로 독일이었다. 독일을 본받는 것이 비교적 현실적이었으며 일본 실정에도 가장 적합했다.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를 모두 시찰한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도 좋지만, 일본의 실정을 감안하면 영국의 수준을 따라잡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국가 체제와 정권 체제에 있어서 독일 내부 정치 상황이 일본과 비슷한 걸 발견하여 독일 헌법을 모방해 헌법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렇다고 독일 헌법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메이지 헌법과 독일 헌법의 관계

 당시 정부는 헌법 초안을 작성할 전문 기구를 설립했다. 초기엔 원로원이, 나중에는 의회가 세계 각국, 특히 유럽에 대해 자세한 연구를 했다. 원로원은 많은 나라의 각종 헌법을 연구했고, 일본의 전통적인 정치 제도와 비교할 때 의미가 모호하고 권력의 중심이 없다고 판단했다. 프랑스와 영국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일본의 전통적인 정치가 무엇인지를 찾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메이지 15년 헌법 제정에 착수한 후, 이토 히로부미는 누가 권력의 중심이 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영국, 프랑스는 물론 미국의 헌법도 일본의 본보기가 될 수 없었다. 미국과 같은 민주적 국가 체제는 일본이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이때 많은 나라 중 가운데 일본과 가장 유사한 군주제 국가인 독일이 그의 눈에 띄었다. 독일이 입헌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독일 헌법을 모방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헌법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많은 외국인 전문가를 초빙했다. 법원이 무엇이고, 국회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국의 의학, 위생학, 건축 등도 모두 배웠다. 정부가 헌법 제정을 위해 외국을 배우는 데 주력하자, 지식인들도 열심히 외국을 연구했다. 또한 일반 시민들까지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메이지 헌법과 천황제

 일본의 천황은 일부러 만들어낸 이미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일본 고유의 전통적인 통치 정신을 유지하고, 이것을 독일의 입헌 군주제와 같은 외국 제도와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까? 이것이 당시 메이지 정부의 주된 고민거리였다. 대다수 일본인에게 천황은 마치 종교와 다름없었고 일본의 전통적 혼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이 종교가 사라지면 일본도 일본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일본의 현대화를 추진하려는 사람들은 이 점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훗날 메이지 헌법을 보면 매우 모순된 두 개의 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혼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는 민권의 혼이었다. 그러므로 해석하기에 따라 어떤 쪽으로든 해석할 수 있다. 훗날 탄생한 헌법에도 커다란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민권 민주와 국민의 권리를 강조하는 반면, 신권을 명시하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모순되고 황당무계한 논리를 나열하고 있는 것이 바로 메이지 헌법이다. 메이지 후기에 와서 헌법과 관련된 사안은 '어떻게 실시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었다.

메이지 헌법을 이끈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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