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후 개혁은 자산 계급의 정치와 경제 체제를 새롭게 수립했고, 현대적인 변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일본 경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속하게 발전해 세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성공했다.
빠르게 회복한 일본 경제
1946년 12월 10일, 도쿄 대학 교수이자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석탄 위원회 위원장인 아리사와 히로미는 '일본 경제의 패국을 살리는 길'이라는 글에서 "기초 원료인 석탄 생산에 모든 경제 정책을 집중해야 한다. 이를 지렛대로 삼아 생활 수준을 향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라고 했다.
당시 일본이 전후에 직면한 위기는 경제 붕괴였다. 실업자가 전체 노동 인구의 20퍼센트인 600만 명에 달했다.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는 당시 일본 대기업 경영자들조차 회식을 열 식당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물자가 귀하고 인플레이션은 심각했다. 일본 스스로 도발한 전쟁이 일본인들을 고난의 수렁으로 내던진 꼴이었다.
미국도 처음에는 패전국인 일본에 배상금을 요구할 계획이었다. 대통령 특사 겸 주일 대사인 토머스 폴리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의 육·해군 공장, 비행기 제조 공장, 경금속 공장의 모든 설비와 철강, 조선, 화력 발전, 기계 제조 설비의 절반을 배상금 명목으로 받고, 일본의 철강 생산 능력을 250만 톤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는데 목소리를 실었다. 미국의 전후 대일본 정책에 변화가 생기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당초 계획의 7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1억 6,000만 달러 상당의 기계 5만 대만을 처분했다.
일본 전후의 경제 회복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긴 안목을 가진 학자와 정치가들이었다. 이시바시 단잔과 오키타 사부로는 패전 직전에 이미 일본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이었다. 요시다 내각은 이들을 주축으로 서둘러 전후 경제 회복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고, 1946년 3월에 발표된 '일본 경제 회복에 관한 기본 문제'를 수정해 경제 계획으로 삼았다.
요시다 정부는 아리사와 히로미의 건의를 받아들여 석탄과 철강 증산에 주력하기로 결정했다. 2년 동안의 집중 생산에 힘입어 일본 경제는 위축된 국면을 극복하고 재생산을 확대했으며, 2년 연속 풍작을 거두어 경제가 서서히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1949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이자 디트로이트 은행 총재였던 '조셉 도지'가 일본을 방문해 점령군 본부 최고경제고문의 신분으로 일본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도지가 일본에 도착하기 전, 국제 정세의 변화로 서방과 소련이 냉전 체제에 돌입한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공산당 혁명이 일어나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점령한다. 미국의 전략가인 조지 캐넌은 미국은 중국 혁명을 억제할 능력이 없으며 아시아에서 지원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일본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밖에 케네스 로열 육군 장관도 일본 공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경우, 일본은 독일처럼 미국의 부담이 될 것으로 주장했다. 이처럼 미국의 대일 정책의 큰 변화로 배상금을 포기하고 오히려 경제 원조까지 실시한다.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은 본인들을 먼저 도발한 일본을 품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을 '동북아의 공장'이자, '공산주의 운동의 방파제'로 삼기로 한 것이다.
도지사는 조사를 실시한 후 "일본 경제는 죽마와 같다. 두 다리가 높이 떠서 죽마를 밟고 있는데, 한쪽은 미국의 원조이고, 다른 한쪽은 일본 정부의 기업에 대한 각종 보조 혜택이다. 이런 '죽마 경제'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으므로 반드시 잘라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첫째, 긴축 재정을 실시하고, 둘째, 1달러당 360엔의 고정 환율제를 실시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처방이 일본 경제가 미국의 경제 원조와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는 상황을 벗어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조셉 도지(1890-1964)
1933년에 디트로이트 은행 총재,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수 계약 가격 조정 위원장, 전후에는 독일 점령 미군 사령관의 금융 고문이 되어 서독의 통화 개혁을 입안하였다. 1947~1948년 미국 은행협회 회장, 1949년 2월 일본 점령군 총사령부의 금융 고문으로서 공사의 자격으로 요시다 내각을 지도하고 새로운 재정 경제 정책인 '도지 라인'을 실시하는 등, 패전 후 일본의 경제 안정과 자립화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 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밑에서 연방 예산 국장, 대통령 대외경제 문제 특별 보좌관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 우리와 일본의 희비 교차
도지의 이런 급브레이크 정책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인플레이션은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이 도산하고 노동자 실업률이 증가하는 등 그로 인한 부작용 역시 컸다. 일본의 경제가 침체를 맞이하고 있을 때, 이를 뒤집을 전환점이 찾아온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두 번째로 찾아온 '천우'라며 일본은 흥분을 금치 못한다. 바로 3년간 이어진 '한국전쟁'이었다.
우리의 비극은 옆 나라 일본에서는 '하늘이 내려준 절호의 기회'였으며 특수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조선 특수 경기'이다. 일본은 미군의 후방 기지로서 창고에 적체되어 있던 재고 물자를 단숨에 모두 팔아버릴 수 있었다. 당시 특수를 누린 물자 가운데 70퍼센트는 무기와 군수 물자였고, 30퍼센트는 노동력이었다. 오늘날 유명한 대기업인 도요타도 한국전쟁 이전에는 도산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군용 트럭 합작 생산 계약 하나로 단번에 회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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