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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54_한국전쟁과 샌프란시스코 조약

by 티제이닷컴 202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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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 공업도 정부의 특별 지원 대상 산업이었다. 1949년,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고 자동차 생산 대수 제한 조치를 폐지했다. 당시 일본의 자동차 생산량은 연간 3만 대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그 후 닛산, 이스즈, 도요타, 히노 등 자동차 생산업체들이 거액을 투자해 외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해 향후 자동차 제조업의 현대화에 기초를 다진다.

 


1호기는 수입하고, 2호기 국산으로

 일본의 합리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술 도입 방식이다. 일본은 거의 모든 기계 공업에 훗날 '1호기 수입, 2호기 국산'이라고 불린 방식이 적용되었다. 일본은 이 방식을 통해 국제적인 선진 기술을 최단 시간에 도입하고 개선해 외국 제품과 대등한 수준의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해 국제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자동차와 전자산업의 성과가 가장 두드러졌는데, 일본 산업계와 기술자들의 학습에 대한 열의와 창의력이 크게 부각되었다.

산업 합리화 시기의 일본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으로 이루어진 이중 구조와 그 격차가 점점 커가는 현실에 직면해 있었다. 일본에는 중소기업 수가 매우 많아 중소기업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유럽과 미국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게다가 중소기업의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 역시 매우 높았기에 수직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기업이 생산에 사용하는 부품 중 절대다수가 중소기업에 의해 가공되었으며, 중소기업 전체 생산량 중 대기업에 납품하는 제품의 가공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80퍼센트에 육박했다. 이러한 양상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일본의 중소기업

 대기업으로서는 중소기업에 위탁하는 방식이 적응력과 탄력성, 리스크 저항력 등에 있어서 훨씬 유리했다. 따라서 정부는 대기업의 발전을 위해 전폭적으로 지원함과 동시에 중소기업들이 자체적으로 확보한 원료를 이용해 생활필수품을 생산하도록 유도했다. 1949년, 일본은 '중소기업의 협동조합법'을 발표해 기업의 횡적인 발전을 촉진했다. 이 밖에도 정부는 세금 감면, 우대 대출 등을 통해 중소기업을 지원했다.

대기업과의 사이에 격차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중소기업들도 라디오, 재봉틀, 자전거, 망원경, 카메라 등 가격이 저렴한 중등 기술 제품과 경방 작품 등을 생산하면서 국제경쟁에서도 상당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 제품은 유럽과 미국, 동남아 등지로 대량 수출되었으며 국제시장 점유율은 갈수록 높아졌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1951년 미국을 비롯한 55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개최된 회의)를 개최했고, 이 중 48개국이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이때 한국과 중국, 미얀마, 인도 등은 배제되었다. 훗날 요시다 시게루는 "대일 강화조약에는 군비에 대한 그 어떤 제한 조항도 없고,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조약에 대해 비교적 만족했으나, 이 조약으로 인해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감정 골은 더욱 깊어진다.

당연하게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최대 수혜자는 미국이었다. 이 조약에 서명하던 날, 미국과 일본은 미일 안보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미국은 일본 국내와 주변 지역에 육해공군을 배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냉전 체제 아래에 미·일 관계에 새로운 체제가 수립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국제 사회에 복귀하여 법률적으로 독립된 지위를 확보했다. 얼마 후, 일본은 국제 노동 기구와 국제 통화 기금 및 세계은행에 가입했고, 1953년에는 UN 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 위원회에 정식 가입했으며, 1955년에는 GATT에 가입했다. 일본은 이들 국제기구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대출받아 산업 합리화를 실시한 것이다. 따라서 국제기구의 대출이 일본의 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일본이 전후 국제 경제 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터준 셈이다.

일본 경제가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국제 통화 기금과 관세 및 무역 협정은 일본에 무역 및 외환 자유화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계기로 일본 경제계는 제품의 국제 경쟁력 강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1954년, 요시다 시게루가 퇴임한다. 하토야마 이치로가 후임 총리로 취임해 일소 공동 선언 조인과 유엔 가입이라는 역사적인 사명을 수행한 후 내각이 총사퇴하였다.

1955년은 일본의 전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일본 정치계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조직한 자민당이 그 후 오랫동안 정치계를 장악했다. 자민당과 정부, 경제계가 주축이 되어 '정관제 일체화'를 이룬 '1955 체제'가 정식으로 구축되었다. 일본 경제는 이때부터 18년 동안 고속 성장 가도를 달리게 된다.

1955년 자유민주당 창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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