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주앙 2세
주앙 2세는 콜럼버스 항해 이전부터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길을 탐사하기 위해 비밀리에 탐험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1487년 디아스가 아프리카 서해안의 대서양을 따라 남하하는 동안 주앙 2세는 페드로 다 카브랄에게 육로를 통해 인도에 다녀올 것을 명령했다.
페드로 다 카브랄(1467/68~1520)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발견한 후 최초로 조직된 인도 파견 선단의 대장이 되었다. 1500년 3월 9일 리스본에서 출발해 희망봉을 향해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서쪽으로 표류하던 중 4월 22일 우연히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곳을 포르투갈의 국왕인 마누엘 1세의 영토로 선포한 후 다시 동진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했고 이듬해 귀국했다. 브라질 발견자는 스페인의 M.A. 핀이지만 카브랄이 더 알려져 있다.
인도로 가는 도중 홍해에 도착한 카브랄의 일행 중 한 명은 프레스터 존이 세운 가톨릭 왕국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카브랄은 아라비아 상인으로 위장하고 여행객 틈에 섞여 홍해 입구에 있는 아덴에 도착했고, 여기서 다시 배를 타고 인도의 캘리컷까지 갔다. 인도에 도착한 그는 계속 북상하면서 인도의 모든 항구를 정탐했다.
그리고 다시 삼각돛 범선을 타고 인도양을 건넜다. 동아프리카에 도착한 카브랄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동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했다. 그는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카이로에 도착한 후 주앙 2세의 사신에게 정보를 넘겼다. 그러나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갔던 카브랄의 동료는 이미 죽었는지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결국 아프리카 내륙 탐험 임무는 카브랄에게 주어졌다.
이제 그는 탐험 생활에 이력이 났지만 왕의 명령을 받고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 후 카브랄은 에티오피아로 가는 길을 발견했고, 훗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포르투갈이 육지 탐험에서 얻은 정보는 1497년 다 가마의 동방 항해 계획을 세우는 데 아주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었다. 주앙 2세는 이미 동방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바스쿠 다 가마, 희망봉을 돌아가다
1494년 6월 7일 스페인의 소도시 토르데시야스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100여 년간 두 나라는 이 조약에 따라 양분된 세계의 서쪽과 동쪽에서 해상 탐험을 진행했다. 주앙 2세는 이 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욕심 많았던 국왕 주앙 2세는 재임 14년 동안 자신의 뒤를 이을 포르투갈의 왕이 동방에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1497년 7월 8일,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37살 바스쿠 다 가마와 170명 선원이 성직자의 축복을 받으며 리스본 거리를 당당히 행진했다. 이들은 다 가마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건조한 배를 타고 인도 신항로 개척길에 올랐다.
다 가마의 함대는 베르데 제도를 지난 후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대서양으로 항해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역풍을 기다렸다. 하지만 함대는 베르데 제도를 지난 후 약 3개월 동안 육지를 볼 수 없었다. 풍향계도 해류도도 없었기 때문에 계획과 달리 아프리카 해안에 기착하게 되었다. 이곳은 희망봉에서 불과 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다 가마는 5개월 동안 아프리카 남단을 탐험하면서 현지 부락민들과 물물 거래를 했다. 그리고 식량선을 불태우고 항해 속도를 높였다. 그는 디아스가 희망봉에 세운 수호신 표지를 지나 어느 유럽인도 가보지 못한 바다에 진입했다. 이 미지의 변화무쌍한 바다에서 다 가마 함대는 단숨에 1,500킬로미터를 항해했다. 그리고 곧바로 동아프리카의 스파라 항과 모잠비크에 도착했다. 다 가마는 이곳에 이르자 드디어 아프리카 끝을 돌아 인도양에 들어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동해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이곳은 모두 독립된 도시국가였고, 화려하고 웅장한 이슬람 사원, 배꼬리가 높이 휘어져 올라간 범선, 깨끗하게 새로 지어진 집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다 가마 일행은 이곳 아프리카인들에게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킬와에서는 현지 부락민들이 다 가마 일행을 습격하려 했는데, 다 가마는 대포로 이들을 격퇴했다.
다 가마는 케냐의 해안 상업 도시 말린디에서 인생의 구세주를 만났다. 다 가마 일행에게 우호적이었던 한 술탄이 여러 번 인도 항로를 항해한 숙련된 항해사 이븐 마지드를 보내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다 가마는 1달 만에 4,000킬로미터를 항해해 인도양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1498년 5월 중순 다 가마 일행은 유럽 상선 최초로 야자나무가 끝없이 펼쳐진 다 새로운 풍경의 인도 캘리컷에 닿았다.
다 가마는 다음 해 9월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다 가마와 함께 떠났던 170명 중 살아 돌아온 선원은 54명뿐이었다. 대신 그 54명이 타고 온 배에는 총원정 비용의 60배가 넘는 양의 향료가 실려 있었다. 포르투갈의 새로운 국왕 마누엘은 다 가마에게 영예로운 작위를 수여하고 스스로를 '대서양 왕, 아프리카 왕, 기니 왕, 그리고 에티오피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의 정복자이자 항해와 무역의 왕'이라고 칭했다.
다 가마가 완성한 신항로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3개 대륙을 연결하고, 대서양과 인도양 그리고 서태평양을 넘나들었다. 이 항로는 훗날 '카레이라 다 인디아'라 불렸다. 370년 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될 때까지 동서양을 오가는 대형 선박은 반드시 다 가마가 개척한 이 항로를 지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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