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양을 지배한 포르투갈 함대
다 가마가 인도까지 몰고 간 함선에는 이동할 수 있는 최신식 대포 20여 대가 실려 있었다. 함대 포진 실력 또한 뛰어나 인도양에서 맞닥뜨린 아라비아 해군을 손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손바닥만 한 영토를 가진 작은 나라가 광활한 동방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최종 목표는 향료 무역을 독점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상권을 장악해야 했다. 이것은 훗날 수 세기 동안 식민지 개척의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먼저 해외에 상업 거점을 세우고 뒤이어 상업 거점을 보호할 요새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현지 토착민과 물물 거래를 하다가 본토 지원군이 오면 영토를 점령하는 방식이었다.
1505년 3월 25일, 포르투갈의 무장 함대가 리스본 항구를 출발했다. 위풍당당한 초대형 함대 20척에는 병사 1,500명과 포수 200명이 타고 있었다. 해군 제독 알메이다는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함대가 출발하기 전, 항해 영웅 바스쿠 다 가마가 직접 함대의 준비 상황을 점검했다.
포르투갈 왕실이 알메이다에게 내린 명령은 다음과 같다. '인도와 아프리카의 모든 이슬람 상업 도시를 점령하고, 각 도시에 포르투갈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요새를 세운다.' 이것은 상업 도시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지브롤터에서 싱가포르까지 모든 해협을 장악해 다른 나라 상선이 통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해서 1505년 여름부터 포르투갈 국기를 달지 않은 배는 단 한 톨의 향료도 운송할 수 없게 되었다.
국왕은 십자가가 수놓아진 비단 깃발을 새로 제작해 직접 알메이다에게 수여했다. 알메이다는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계 바다 지배를 맹세했다.
1506년, 캘리컷의 통치자들은 포르투갈 해적들이 다시 정예부대를 이끌고 쳐들어올 것을 예상했다. 포르투갈의 목적은 이제 백일하에 드러났다. 인도양을 오가던 모든 배들은 감히 바다로 나가지 못했다. 인도와 이집트 사이 항로가 폐쇄되자 향료 무역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이에 이집트 술탄은 교황에게 포르투갈이 계속 인도양에서 횡포를 부리면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이미 포르투갈의 기세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들은 포르투갈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몰래 포르투갈에 대항할 세력을 규합했다. 이집트 술탄은 베니스 상인들과 암암리에 캘리컷으로 총과 대포를 운송했다.
3월 16일 캘리컷의 군함 200척이 포르투갈 함대 11척을 기습했다. 그러나 한 이탈리아인이 이 정보를 미리 포르투갈에 전했다. 카나노르 전투로 불리는 이날 전투에서 포르투갈은 80명이 죽고 200명이 다쳤지만 최종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 승리로 포르투갈은 인도의 모든 해상권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날 다친 200명 포르투갈 군인 중 훗날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있었으니 바로 마젤란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가는 길
유럽은 14세기부터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가장 큰 이유는 지중해에서 오스만 튀르크의 세력이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유럽인에게 지중해는 막다른 길이 되었다. 오스만 튀르크가 막아버린 무역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아프리카에서 금, 은, 노예, 상아 등을 수입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 실크로드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를 넘어 아시아로 갈 수 있는 신항로 개척이 당시 유럽에는 매우 절박했다. 특히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희망봉을 거쳐 아시아로 향하는 탐험을 멈추지 않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항해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프리카의 노예, 황금, 상아를 얻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아시아의 향료를 직접 들여오는 것이었다. 14, 15세기 유럽에서는 향료를 이용해 고기를 보존하는 것이 보편적이었고, 유럽 시장에서는 향료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전설 속의 향료제도로 가는 항로와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끊임없이 탐험대를 파견했고, 그 결과 유럽의 무역 시장은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었다.
당시 유럽에는 수많은 재단이 있었는데, 그중 이탈리아 재단은 콜럼버스 항해를 일부 후원하기도 했다. 이들은 해양 탐험이 커다란 부를 창출해 원금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막대한 이익까지 가져다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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