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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마카오, 나가사키까지 진출한 포르투갈 포르투갈의 아시아 진출, 마카오를 넘어 나가사키로 15세기까지 중국은 포르투갈에겐 여전히 신비의 나라였다. 그전까지는 주로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르투갈 국왕은 실크로드를 대신할 해상 항로를 개척해 중국의 상품을 리스본으로 운송할 계획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말라카는 바로 중국 무역을 위한 주요 거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포르투갈 정부가 세케이라를 파견해 말라카를 공격하러 갔을 때 말라카의 술탄은 급히 명나라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명나라 무종은 술탄의 요청을 묵살하고 오히려 그를 질책하는 칙서를 보냈을 뿐이다. 16세기 중엽 포르투갈은 고리를 말린다는 핑계로 중국 마카오에 정식으로 장기 체류하기 시작했다. 또 일본 나가사키에 무역 상관을 세움으로써 포르투갈은 나가사.. 2024. 5. 12.
[포르투갈] 인도 고아, 말라카해협: 동방 무역의 거점을 만들다 알부케르크는 1509년에서 1515년까지 포르투갈의 인도 식민 정부 2대 총독을 지낸 인물로, 당시 과감하고 새로운 식민지 개척 전략을 펼쳤다. 그는 먼저 홍해의 소코트라섬을 공격하고 다시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를 점령했다. 인도에 도착한 알부케르크는 캘리컷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먼저 고아를 점령해 포르투갈의 해군기지와 베이스캠프를 세웠다.포르투갈, 무역의 요충지 말라카를 점령하라 그러나 알부케르크의 목적은 인도 동쪽에 있는 전략 요지 말라카였다. 당시 포르투갈 왕실은 향료제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라카 해협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처음부터 함대를 파견하지 않고 세케이라에게 말라카를 정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세케이라는 인도 코친 항에서 정찰선 4척을 이끌고 비밀리에 떠.. 2024. 5. 11.
[포르투갈] 인도양, 포르투갈 손에 들어가다 인도양을 지배한 포르투갈 함대 다 가마가 인도까지 몰고 간 함선에는 이동할 수 있는 최신식 대포 20여 대가 실려 있었다. 함대 포진 실력 또한 뛰어나 인도양에서 맞닥뜨린 아라비아 해군을 손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손바닥만 한 영토를 가진 작은 나라가 광활한 동방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최종 목표는 향료 무역을 독점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상권을 장악해야 했다. 이것은 훗날 수 세기 동안 식민지 개척의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먼저 해외에 상업 거점을 세우고 뒤이어 상업 거점을 보호할 요새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현지 토착민과 물물 거래를 하다가 본토 지원군이 오면 영토를 점령하는 방식이었다. 1505년 3월 25일, 포르투갈의 무장.. 2024. 5. 11.
[포르투갈] 바스쿠 다 가마, 인도 항로를 개척하다 포르투갈의 주앙 2세 주앙 2세는 콜럼버스 항해 이전부터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길을 탐사하기 위해 비밀리에 탐험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1487년 디아스가 아프리카 서해안의 대서양을 따라 남하하는 동안 주앙 2세는 페드로 다 카브랄에게 육로를 통해 인도에 다녀올 것을 명령했다.페드로 다 카브랄(1467/68~1520)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발견한 후 최초로 조직된 인도 파견 선단의 대장이 되었다. 1500년 3월 9일 리스본에서 출발해 희망봉을 향해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서쪽으로 표류하던 중 4월 22일 우연히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곳을 포르투갈의 국왕인 마누엘 1세의 영토로 선포한 후 다시 동진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했고 이듬해 귀국했다. 브라질 발견자는 스페인의 M.A. 핀이지만 카.. 2024. 5. 10.
[포르투갈] 콜럼버스와 포르투갈의 주앙 2세 신대륙 발견과 동방 항로 개척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포르투갈의 동방 항로 개척은 유럽과 세계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항해와 개척으로 인해 사람들이 온전한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진정한 세계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콜럼버스의 항해가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콜럼버스의 항해로 세계 모든 대륙이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이후 나라와 나라 사이의 무역과 문화 교류도 증가했다.주앙 2세와 인도 항로 콜럼버스의 1차 항해 성공 소식을 가장 처음 접한 왕은 스페인의 여왕과 국왕이 아니었다. 처음 콜럼버스의 요구를 거절했던 포르투갈의 주앙 2세였다. 귀항 중이던 콜럼버스는 서풍 무역대에서 태풍을 만나 어쩔 수 없이 포르투갈 항구에 기착해야 했.. 2024. 5. 10.
[스페인] 콜럼버스, 1492년 10월 12일 아메리카에 도착하다 콜럼버스의 위대한 출항 1492년 8월 3일은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던 맑고 고요한 날이었다. 오전 2시경 콜럼버스는 산 호르헤 교회에서 성찬식을 치렀다. 그리고 날이 밝기 전 기함에 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출항을 지시했다. 소규모 함대의 니냐 호, 핀타 호, 산타 마리아 호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팔로스항을 떠났다. 이즈음 포르투갈인들은 길이 70피트에 60톤짜리 캐러벨 선을 발명했다. 이 배는 갑판 아래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넓지는 않았으나 흘수선(배가 물 위에 떠 있을 때, 배와 수면이 접하는, 경계가 되는 선)이 낮아 해안에 접근하거나 작은 항만을 탐험하기에 적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원정 탐험 때 대부분 이 배를 이용했다. 캐러벨 선은 대부분 삼각 돛대를 달았는데, 약.. 2024. 5. 9.
[스페인] 가톨릭, 종교 재판소 그리고 콜럼버스 이사벨 여왕의 종교 이사벨 여왕은 가톨릭 수호자로 스페인 통일을 촉진했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이베리아반도에서 아라비아인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통일 후에도 그녀가 해결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었다. 우선, 그녀는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일련의 법률을 제정했으며,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국가 기관을 설립했다. 이사벨 여왕이 세운 통일 국가의 영토는 무어인이 점유하고 있던 스페인 남부 카스티야, 칸타브리아, 아스투리아스와 북부 바스크 지역까지 포함되었다. 이사벨 여왕은 독실한 가톨릭 수호자로 종교 부분에서만큼은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했는데, 일례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아랍인과 유대인을 이베리아반도에서 모두 쫓아내 버릴 정도였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한 것도 종교적 이유가 컸으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2024. 5. 9.
[스페인] 역사를 바꾼 여왕의 최후 선택,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하다 역사를 바꾼 포르투갈, 스페인의 결정 이사벨 여왕이 그라나다에 입성하는 그 순간 포르투갈에서 온 한 항해사가 초조하게 여왕과의 두 번째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여왕과 스페인에 큰 영광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사람이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이미 8년을 기다렸다. 그는 스페인에 오기 전 포르투갈에서 가정을 이루고 많은 항해 경험을 쌓았다. 그는 매일 리스본의 항해사들과 드넓은 대서양을 바라보며 상상했다.'서쪽으로 가면 중국으로 가는 길이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포르투갈, 콜럼버스의 제안을 거절하다 콜럼버스가 포르투갈에 도착하기 전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5세는 이미 피렌체의 천문학자 토스카넬리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한 바 있다.. 2024. 5. 8.
[스페인] 가톨릭 부부왕,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하다. 스페인 제국의 시작 그라나다 입성, 800년 만의 국토 수복 역사의 그날 이른 아침, 스페인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 성 밖에 있는 네바다 산에 올랐다. 당시 유럽의 가톨릭 국가 여왕 중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했던 그녀는 하루에 4번씩 목욕을 할 정도로 청결을 중요시했다. 그러한 그녀였지만 2년 전에는 그라나다 성 앞에서 "그라나다를 되찾기 전까지 절대 군복을 벗지 않겠다."라고 맹세했을 정도로 국토 수복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가 결혼했다. 3년 후 두 사람은 함께 스페인의 여왕과 국왕으로 등극해 그 유명한 가톨릭 부부 왕이 되었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도 스페인의 통일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8세기부터 당시까지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를 점거.. 2024.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