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영국61 [영국]#41_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존 로크 사상 강력한 군주와 전제 군주 유럽과 영국 사회가 중세에서 현대로 넘어갈 때, 강력한 군주제도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강력한 군주는 이들 국가에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으며, 국왕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해 주는 '애국주의'의 표상이었다. 16, 17세기에 군주들은 각 민족국가의 부흥을 이끌었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이 전제정치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전제적인 군주는 신민의 의견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에 부딪혔을 때도 결코 이를 수용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입헌군주제의 형성 1688년 이후, 영국에서는 입헌군주제가 정착하게 된다.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게 된 것이다. 국왕은 정책을 결정할 때 의회의 동의를 거쳐야 했으며,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때도 의회의 비준을 얻어야 했다.. 2024. 8. 8. [영국]#40_권리장전을 통해 입헌군주제 확립하다 권리장전과 입헌군주제 확립 1689년 2월 13일, 의회는 윌리엄 부부를 위해 웅장하고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 전례는 까다롭기 그지없었지만, 새로운 국왕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에 대한 신민들의 애정과 신뢰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때의 대관식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의회 대표였던 핼리팩스 경이 두 군주에게 왕관을 헌납하고, 잠시 후 의회의 정신을 담은 주요 문건인 '권리선언'을 국왕들에게 전달했다. 이미 합의된 내용이었기에 새로운 국왕 부부는 대중을 향해 '권리선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을 계승한 이 선언문은 영국 사회의 자유주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는 각종 '권리'를 시민과 국왕 사이의 '계약' 형식으로 규정한 영국 헌정 제도의 근간이 되는 문건이었다. .. 2024. 8. 7. [영국]#39_영국 부부 왕의 탄생과 영국-네덜란드 전쟁 윌리엄 3세와 메리, 영국의 부부 왕이 되다. 1688년 12월 11일 새벽, 제임스 2세는 조용히 왕궁을 떠나 아일랜드로 향했다. 하지만 가던 도중 그는 한 어부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시민들에 의해 죄인처럼 런던으로 압송되어 왔다. 난처해진 윌리엄은 사람을 보내 제임스 2세에게 18일 오전까지 런던을 떠나라는 말을 전했다. 이때 또 다른 희극이 연출되었다. 제임스 2세는 로체스터 성으로 몸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루라도 빨리 왕좌에 오르고 싶었던 윌리엄은 장인과 시시콜콜 협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제임스 2세의 요청을 수락했다. 윌리엄은 런던에서 로체스터로 가는 모든 육로를 봉쇄한 것처럼 꾸몄다. 장인이 수로를 통해 로체스터로 도망가도록 해준 것이다. 로체스터에 도착한 제임스 2.. 2024. 8. 6. [영국]#38_구교냐 신교냐, 제임스 2세냐 윌리엄 3세냐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의 영국행 영국의 의회가 네덜란드의 총독 부부를 국왕으로 초청한 것은 어찌 보면 모험이었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영국의 군대가 다시 국왕에게 충성을 바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빌럼(윌리엄)의 군대를 가로막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시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서로 등을 돌리던 상황이었다. 이 계획이 실패한다면 모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어찌 되었든 새로운 국왕을 불러오기 위한 준비는 모두 마친 상태였다. 이제 민심을 얻기 위해 여론을 모아야 했다. 1688년 10월 초순에 영국 각 도시의 번화가, 심지어는 궁벽한 농촌 지역에까지 대량의 선전물과 전단, 벽보가 나돌았다. 국왕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며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2024. 8. 5. 이전 1 ··· 3 4 5 6 7 8 9 ··· 1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