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영국61 [영국]#37_ 영국의 '명예혁명' 명예혁명이 이루어지기까지 16세기 이후 영국에서 가톨릭은 전제왕권과의 상관관계로 인해 증오의 대상이 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가 영국을 통치한다는 것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었지만, 군주제를 존중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국민들은 국왕을 보위해야 하는데, 그 국왕은 가톨릭을 믿고, 국민들은 그 가톨릭을 증오하는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다. 제임스 2세는 즉위 후 3년 동안 가톨릭 편향 정책을 서서히 강화했다. 그러다가 1688년, 그가 로마 교황의 뜻을 받들어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자 영국 국민들은 마침내 국왕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바로 제임스 2세의 사위였던 네덜란드 총독 빌럼 공에게 초청장을 보내 국왕의 자리를.. 2024. 8. 4. [영국]#36_ 1688년,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신자였다 제임스 2세는 곧 영국국교회와 사회 각 계층의 저항에 직면했다. 군인들조차 더 이상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영국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미 통치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대다수 영국인은 이 고집 센 늙은이가 하루빨리 죽고 신교도인 그의 딸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기를 염원했다. 국민들은 국왕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무력으로 왕위를 전복시키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합법적인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는 1만 6,000명의 군인을 런던에 주둔시키며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정세는 급변했고, 1688년의 런던은 1642년에 영국 내전이 시작되던 때처.. 2024. 7. 28. [영국]#35_크롬웰 이후,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집권한 영국 찰스 2세의 왕정복고 왕실이 다시 들어선 이후 잉글랜드는 피의 보복으로 인해 공포감이 진동했다. 찰스 1세의 처형을 주도했던 크롬웰 경과 당시 재판장이었던 브래드쇼 경은 국왕 시해죄를 선고받고 부관참시에 처했다. 그들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은 사정없이 베어져 교수대 밑에 다시 매장되었다. 위대했던 호국경도 국왕 찰스 1세처럼 목이 잘려 나갔지만, 사후는 그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왕당파는 부패한 시체 두 구에 광기 어린 분노를 쏟아냈다. 그들은 크롬웰의 머리를 찰스 1세가 재판을 받았던 웨스트민스터 홀 꼭대기에 내거는 것으로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마무리 지었다. 과거에 혁명이 고조되면서 수모를 겪었던 의원들은 이제 의회를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고귀한 의원들에게는 크롬웰에 대한 .. 2024. 7. 27. [영국]#34_크롬웰의 생애와 크롬웰 관점으로 본 영국내전 크롬웰의 생애 1599년, 크롬웰은 잉글랜드 헌팅던의 평범한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며 청교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하자 대학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뒤 20여 년 동안 농사를 짓고 조세와 법률을 공부하며 지냈다. 이때까지 크롬웰은 전혀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열 명이 넘는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1628년과 1640년에 각각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영국 내전이 그의 운명을 바꿔 놓지 않았더라면, 크롬웰은 아마도 가난한 시골 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40세가 넘도록 단 한 번도 군인이었던 적이 없었기에 그때까지는 누구도 그에게서 군사 영웅의 기질을 발견.. 2024. 7. 26. 이전 1 ··· 4 5 6 7 8 9 10 ··· 1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