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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번외_'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by 티제이닷컴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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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70세가 되도록 수많은 사업을 경영했다. 그는 자본주의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었으며, 자본주의의 기본인 이윤 추구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더라도 도덕과 윤리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도 행동해야 하며,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 역시 옳은 행동이 아니라며 날 선 비판을 하였다. 

 당시까지도 일본에 널리 퍼져있던 유교적 사고관은 장사를 굉장히 불결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장사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70세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의 널리 알리기 위해 '논어와 주판'이라는 저서를 저술하였고, 본인의 주장을 담은 오디오 레코드를 제작해 사회적으로 홍보하였다.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살던 시대에는 민영 기업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관영기업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민영기업은 관영기업의 위세에 눌려 발전이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어떻게 하면 현 국면을 타개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관료였지만 사실 스스로 원해서 관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민중의 대표라고 생각했으며, 정부 관리가 된 후에도 현대화와 산업 발전을 최우선으로 다루었다. 유럽 시찰은 그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관직에 머무르며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개혁을 지원했다.

 유럽 시찰 중 그는 유럽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던 관민 일체화를 직접 보고 느꼈으며, 관리는 귀하고 백성은 비천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의 낡아빠진 관존민비 의식과 사회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시찰 중 빌기에 국왕과 나폴레옹 3세를 모두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일본이 앞으로 현대 국가를 세우고 경제 번영을 이룰 것인데, 그 과정에서 '철'이 빠질 순 없을 거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근대화에 있어 철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자국의 철을 수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국왕이 직접 무역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에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일본 정치가들에게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관존민비 구조를 개혁하겠다는 신념을 더욱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주식회사 제도를 수립하고 여러 업종에 걸쳐 각종 사업을 경영했다. 기업가들은 한 업종에만 손을 대는 것이 보통이지만,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여러 업종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일본 미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또 사회 전체 번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업을 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500여 개 기업을 설립하고 경영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그는 기업 경영을 통해 얻은 이익은 당연히 사회로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회 복지와 의료, 교육 등의 분야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또 민간 부문의 국제적인 교류에도 힘을 쏟아 정부의 역할을 보완했으며, 가난한 사람들까지 잊지 않고 살펴 돌봤다고 한다.


자유 민권 운동은 일본 산업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처음에는 일본 정책도 중국처럼 관영기업 위주로 반관반민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중국은 이 정책을 고수했지만, 일본은 일찌감치 이 정책을 폐지해 버렸다. 당시 일본 정부는 관영기업을 대거 민영기업에다 매각하고, 민영기업 중심으로 산업계를 재편했다. 이 부분이 바로 일본과 중국의 향후 백 년에 이르는 경제 발전에 격차가 생긴 직접적 원인이 될 수 있다. 이 원인의 배경에는 일본의 자유 민권 운동이 있었다. 자유 민권 운동은 국회 설립을 촉구한 것 외에도, 관영기업과 반관반민 기업을 폐지하지 않으면 민영기업이 발전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미쓰비시, 미쓰이 등 일본 기업들이 정부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얻기는 했지만, 점차 민영기업의 비중이 더 커질 수 있었다.

 자유 민권 운동의 요지는 일본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민영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식산흥업을 전후 두 시기로 나누면, 전반기는 관영기업과 반관반민 기업이 중심이었지만, 후반기는 민권 운동이 점점 고조되어 정부가 방침을 바꾸어 관영기업을 민영기업에 매각해야만 했다. 따라서 식산흥업 후반기는 민영기업이 경제발전을 주도하도록 했다. 이것은 일본 산업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메이지 유신 초기 시부사와 에이이치
죄: 1866년, 우: 1867년.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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