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초기 산업화 단계 시기에 일본의 식산흥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기존의 관영 기업들을 대부분 민간 부문에 매각해 민간 자본주의 발전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정부 관영기업 설립은 기업이 실리를 거두는 것을 보여주어 민간 부문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였다. 따라서 정부는 선진 기술을 도입해 기술자를 양성한 후 이 기업들을 민간 부문에 매각했다.
메이지유신 1890년대, 산업의 발전
그러나 이들 기업은 관영으로 운영됐기 때문에 관리층의 임금이 너무 높고, 기업의 지출이 과도하다는 둥 여러 가지 문제점에 봉착해 있었다. 1880년대 초에는 철도, 광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이 해마다 적자에 시달렸다. 1880년 일본 정부가 관영기업들을 매각한 것은 국가의 기업 설립 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 거액의 보조금 부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적자 기업 매각을 결정한 직후에는 가격이 너무 높아 아무도 인수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가격을 낮추고 무이자 장기 대출 혜택을 주고 나서야 인수하겠다는 희망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조치는 훗날 일본의 '재벌'(자이바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해체되고 기업집단인 게이레츠로 대체됨) 형성에 기초를 제공했다.
정부는 우선 이 관영기업들을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대자본가와 신흥 자본가에게 매각해다. 미쓰이가 미이케 탄광과 도미오카 제사 공장을 인수했고, 미쓰비시는 정부로부터 나가사키 조선소와 사도 금광, 이쿠노 은광을 인수했다. 기업 인수 가격이 기업 평가 자산에 크게 못 미쳤기 때문에 거의 무상으로 양도한 것과 다름없었다. 또 정부는 이들 민영기업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경영 보조금을 지원했다. 미쓰비시가 바로 정부의 보조를 발판 삼아 발전한 대표적 기업인데, 이는 증기선 분야에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도록 하는 데 정부의 목적이 있었다.
1875년에 미쓰비시는 총규모 2만 3,000톤에 달하는 37척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당시 일본에 있는 대형 선박은 모두 미쓰비시 소유였으며, 상하이로 가는 항로를 개통하고 미국과 영국의 대형 선박 회사와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1885년, 미쓰비시와 교도 운수 회사가 합병해 일본 우편선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선박이 모두 58척이었는데, 1893년에는 선박 총규모가 11만 톤에 달했다.
1882년,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평생동안 500여 개의 기업을 설립한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오쿠라 기하치로, 마스다 다카시 등 경제계 유명 인사와 전 다이묘 21명이 공동으로 '오사카 방직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1880년대 중반에는 방직 회사 설립이 붐을 이루었고 근대화된 방직 공장들이 속속 들어섰다. 산업화의 물결이 일본의 각 산업에 밀어닥친 것이다. 이 가운데 산업화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분야가 바로 경공업이었다.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방직 산업은 산업계를 주도하는 위치로 올라섰다. 1892년에는 일본 국내 시장에서 수입사가 자취를 감췄고 역으로 외국으로 제품을 수출하는 단계까지 성장했다.
그 외에도 총길이 182마일에 불과했던 철도 역시 1893년에는 1,900마일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기차 351대, 화물 및 승객 운송능력이 각각 204만 톤과 3,253만 명에 달했다. 또한 1892년, 기업의 수가 5,444개에 달했으며 종업원 수는 38만 명까지 증가했고, 대외 무역 수출액과 수입액도 각각 9,111만 엔과 7,132만 엔에 달했다.
이로써 일본의 자본주의 사업화가 10년 동안의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기본적인 토대를 닦은 셈이다. 전후 일본 총리를 역임한 요시다 시게루는 자신의 저서에서 세계적인 산업 혁명의 발전이 일본의 식산흥업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일본의 근대화는 매우 운이 좋은 조건에서 시작되었다. 우선 19세기 말, 선진국들이 대부분 이미 산업 혁명을 거치긴 했지만 기술 수준은 아직 숙련과 경험 축적의 단계에서 과학적인 실증 단계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었다. 근대 철강 공업이 막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나 화학 공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철도 건설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지만, 조선업에 있어서는 증기선이 범선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기술 수준에 있어서는 일본과 선진국 사이에 격차가 크진 않았다. 일본인들은 선진 기술을 도입하는 동시에 전통 기술을 효과적으로 응용해 선진국들을 빠르게 추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본은 철도와 증기선을 중심으로 한 제2차 산업 혁명의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또한 국가가 교육을 통해 신기술을 국민들에게 보급하는 한편, 산업 발전 지원책을 시행한 것도 큰 효과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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