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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31_입헌 군주제와 독일식 군제 개편, 메이지 유신

by 티제이닷컴 202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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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년,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는 기구인 '제도 조사국'을 설치하고, 자신과 똑같이 독일 헌법을 지지하는 이노우에 고와시에게 초안 작성을 맡겼다. 이는 군주의 권력이 강하고 정당의 권력이 제한적인 국가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헌법에 적응하기 위한 일련의 체제 개혁을 실시하였다.


일본의 입헌군주제


 이 같은 체제 개혁에서는 천황의 대권이 그 핵심에 있었다. '헌법' 이외에도 이토 히로부미가 황위 계승, 황족의 명분, 황실 재산 등에 관해 규정한 '황가전범'이 있었고, 황실에 관련된 일은 헌법과 국무, 의회를 초월했다. 또 이토 히로부미는 정당으로 구성된 중의원을 견제하기 위해 중의원보다 권력이 강한 기관으로 귀족원을 두었다. 귀족원의 관리들은 민선을 거치지 않고 천황이 임명하도록 했다.

 이 밖에도 '화족령'을 발표해 유신 이후 구게, 다이묘, 신관 등 조정에 참여했던 유신 공신들에게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 5등급의 작위를 하사하여 신화족(공가나 제후 출신이 아님에도 공훈으로 작위를 받은 그룹)을 형성했다.

 이로써 이와쿠라 도모미의 아들과 조슈 및 사쓰마의 번주는 공작으로 봉해지고,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의 아들은 후작이 되었으며, 조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쓰마 출신인 구로다 기요타카, 사이고 쓰구미치, 마쓰카타 마사요시, 요야마 이와오 등은 백작이 되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는 1885년에 관제 개혁 착수에 나섰다. 그는 태정 대신인 산죠 사네토미에게 유럽식 입헌 정치를 실시할 때는 반드시 총리대신이 각 성의 전임대신들을 통솔해 정무를 처리하고, 국회를 견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결국 여러 절충 작업을 거쳐 유신 이래로 실행되어 왔던 복고적 색채가 짙었던 태정관 제도를 폐지하게 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의 윤허를 받아 일본 역사상 최초의 내각 총리 대신이 되었다. 초대 내각의 구성원 10명 가운데, 조슈와 사쓰마 출신은 각각 4명이었다. 이는 조슈와 사쓰마의 과두 정치를 정규화하는 과정이었다.

 이후 일본 역사에서 번벌 출신의 일부 관리들이 중요한 지위를 독점하고 사쓰마와 조슈 출신의 과두가 세력 균형을 유지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네 차례나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되고, 총리대신은 몇몇 원로들이 돌아가면서 맡았다. 메이지 말기에 이르러서는 구로다 기요타카,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이고 쓰구미치, 마쓰카타 사요시, 사이온지 긴모치 등이 원로가 되어 일본 정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일본 군제, 독일식으로 개편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 개조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군제와 지방 자치제에 대한 개혁에 착수했다. 1880년대부터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기존의 프랑스식 군제를 폐지하고 독일식 군제를 실시했다. 육군의 제2대 지도자인 가쓰라 다로와 가와가미 소로쿠, 고다마 겐타로, 노기 마레스케, 그리고 독일인 군사 고문이 군제 개혁을 주도했다.

 이 개혁은 기존의 진대 편제를 사대 편제로 전환하고, 보병, 기병, 공병, 치중병(군수품 나르는 병사) 등의 병과 조직을 사단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군정을 책임진 육군성과 군령을 책임진 참모본부, 그리고 교육과 인사를 총괄하는 감군부가 천황의 최고 육군 참의관이 되어 군제 개혁을 주도하는 고급 사령 기구가 되었다. 또한 징병령을 개정해 육군 1년 지원병 조례를 제정하고, 기충 구조의 병역 제도를 개혁해 종전의 면역 조건을 엄격하게 제한, '전민개병'을 시행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징병을 실시했다.

 군제 개혁으로 인해 일본에 근대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 체제가 수립되었다, 지방 자치는 헌법 제정의 전제로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우선 전국의 시, 정, 촌에 대한 개혁을 실시했다. 7만 여 개에 달했던 정촌을 1만 3,000여 개로 정리했다. 인구 2만 5,000여 명의 정촌은 시로 승격시켜 39개 시가 설립되었다. 정촌에는 2급 선거법이 실시되어 1급 재산 자격을 가진 사람은 시의회 회원의 3분의 1을 선출할 수 있었다.

 군제는 정촌 의회에서 선출한 의원과 대지주로 구성되었는데, 대지주는 군의회 의원의 3분의 1을 점유할 수 있었고, 이는 정부의 감독 아래 국가의 행정과 지방의 공통 사무를 처리하는 조직이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정과 촌에서 국가의 행정과 지방의 공통 사무를 분담하는 지도자는 무보수 명예직으로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장정들이 병역을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도 국민이라면 해야 할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징병의 원칙을 지방 제도 수립에도 적용해 '병농일치'를 주장했다. 군대의 질서로 국민들을 조직함으로써 군국주의의 사회 기층 조직으로 삼았다.

일본 육군 장교 단체사진
1875년경 일본 육군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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