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12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제정을 보장하기 위해 2부 18현의 민권대표 90여 명이 원로원에 제출한 요구안을 탄압하기로 결정했다. 17일,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집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도쿄 경시청 총감인 미시마 미치쓰네가 진압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했다.
반대파를 짓눌러 헌법 제정을 준비하다
12월 26일, 정부는 '보안 조례'를 발표하고 비밀 결사와 실외 집회, 내란을 조장하는 서적 및 선전물 인쇄를 엄격히 금지하고, 12킬로미터에 달하는 황궁 구역 내에서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의 거주와 체류를 금지했다.
이 밖에도 570명을 추려 1~3년간 도쿄에서 추방하고, 경찰의 명령에 저항하는 자는 사살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밀명을 내렸다. 군대에 군용 전화선을 매설하고, 각 부대에 헌병을 두었으며, 육군병원에 응급환자 조치를 위한 조직도 마련했다. 추방 대상인 570명 중에는 호시 토오루, 오자키 유키오, 가타오카 겐키치 등의 명성이 자자한 민권주의 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26일 새벽, '일본의 루소'라고 불리는 나카에 조민이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을 뚫고선 생후 몇 달밖에 안 된 딸을 품에 끌어안고 도쿄를 떠나 오사카로 향했다. 얼마 후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서신에 "자유와 평등이 점점 중요해지는 이 시기에 메이지 정부의 관용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니!"라며 한탄했다.
나카에 조민(1847~1901)
187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철학, 사학, 문학 등을 연구하였다. 1874년 귀국하여 불학숙을 열고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전파했고, 1881년 사이온지 긴모치가 창간한 '동양자유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프랑스식 민권 사상을 보급하고 일본 정부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으며,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번역한 '민약역해'를 실어 '일본의 루소'로 이름을 떨쳤다.
이로 인해 한때 전국적으로 성행했던 자유 민권 운동은 완전히 빛을 잃고 말았다. 1887년,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헌법 제정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법제 조사국 책임자인 이노우에 고와시는 "이 초안을 작성해서 천황 폐하에게 제출하고 나면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오"라고 말한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헌법 초안 작성이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도쿄 관저에서 진행되다가, 가나가와현 가나자와의 여관으로 옮겼고, 마지막으로 요코스카의 나쓰시마에 위치한 이토 히로부미 개인 별장에서 완성되었다. 이노우에 고와시는 독일 법률 정신을 바탕으로 일본의 제국 헌법을 제정해 근대 천황제의 법률적 기초를 마련했다.
메이지 유신, 헌법을 반포하다
1888년 4월, 이토 히로부미가 천황에게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제출했다. 당시 일부 국민과 정부 관리들은 이 초안을 국회나 관민 공동 헌법 의회에 제출해 토론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흠정 헌법을 고집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한 마디로 딱 잘라 거절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의 최고 자문 기구인 추밀원이 흠정 헌법을 심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스스로 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직에 취임했다. 6월 18일부터 천황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비밀리에 헌법 초안에 대한 심의가 시작되었고, 1889년 1월 13일에 완전히 확정되었다.
메이지 천황의 국호 개정 20주년 기념일인 2월 11일, 황궁에서 헌법 반포식이 거행되었다. 추밀원 원장인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을 내대신인 산죠 사네토미에게 전달하자, 산죠 사네토미가 천황에게 바쳤다. 천황이 '헌법 반포 칙어'를 낭독하고 총리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건네자, 악단이 '기미가요(일본 국가)'를 연주하고 예포가 발사된 후 천황이 퇴장했다.
헌법 반포식에 참석했던 문무백관과 외국 사절들은 기념식이 끝난 후에야 일문판과 영문판으로 ㅈ가성된 '대일본제국헌법'과 '황실전범', '의회법' 등의 관련 문건을 볼 수 있었다.
이 기념식은 천황이 직접 헌법을 하사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날, 정부는 천황 칙령의 형식으로 대사면령을 발표한다. 1874년 이후 사족의 반란과 자유 민권 운동, 대동단결 운동 등으로 수감되었던 시국사범들을 사면하고, 몇 개월 전 치안 조례 위반으로 추방했던 사람들도 사면했다. 천황은 메이지 유신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웠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정 3품을 추서하고, 유신 공신에 포함시켰다.
대일본제국헌법은 아시아 최초의 자산 계급 헌법이자, 메이지 유신을 최초로 총괄한 것이었다. 이 헌법의 반포는 일본이라는 아시아의 변방에 있던 국가가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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