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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33_제국 헌법 특징과 황국 사관, 메이지 유신

by 티제이닷컴 202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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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 헌법에 의해 최종적으로 확립된 근대 일본 천황제는 일본의 근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총 7장 76조로 구성된 이 헌법의 제 1장 17조에서는 천황의 권력을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천황은 신성불가침하다',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독점하며, 본 헌법의 각 조 규정에 따라 통치권을 행사한다', '천황은 제국의회의 협조와 찬동 아래 입법권을 행사한다', '천황은 육·해군을 통솔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의 제국 헌법 특징과 한계점

 신하와 백성의 권력과 의무에 대한 규정을 보면, 일본 신민들은 각종 권력과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당당히 밝혔지만, 법률로써 이를 제한하고 취소했다. 전시, 또는 국가에 사변이 생겼을 경우에는 천황의 대권 수행을 방해할 수 없도록 제한을 걸어놓은 것이다.

 제국의회 관련 규정에서는 기존의 귀족원과 중의원이 제국의회를 구성했다. 귀족원의 의원 중 일부는 종신적으로, 그 외에는 7년 임기로 했다. 하지만 중의원 임기는 고작 4년에 불과했다. 천황은 중의원을 해산할 수 있었지만, 귀족원의 해산을 막을 수 있는 권력은 없었다. 입법기관임에도 입법권을 천황 및 의회와 공동으로 소유했던 것이다.

 추밀원은 사실상 내각과 의회를 초월하는 최고 정책 결정 기관으로 규정되었다. 의회의 권력을 확대해 정당 내각제를 수립하기는 했지만, 번벌 세력의 우두머리가 여전히 추밀원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천황의 명의를 빌려 정치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헌정을 실시한 결과가 국가에 이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예상할 수 없다.", "20년 전 봉건 정치를 폐지하고 여러 나라와 왕래를 시작한 이상, 국가의 발전을 꾀하고 다른 나라의 좋은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라며 주요 제정자로서의 복잡한 심경을 밝힌 적이 있다. 그는 또 일본에 기독교처럼 민심을 하나로 모을만한 종교가 없는 사실에 아쉬워하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백성들이 함부로 정치를 논하는 대로 따른다면, 정치가 기강을 잃고 국가가 멸망할 것이다.", "일본에서 나라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건 황실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른 나라의 헌법에서는 백성은 국민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 헌법에서 백성은 신민이 되었다. 민권과 군권이 대등한 관계에서 상하관계로 변했다. 또한 천황의 권력을 절대 권력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10여 년 동안 전국적으로 성행한 자유 민권 운동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황국 사관의 망령

 메이지 23년인 1890년 10월 30일, 메이지 천황은 간단한 '교육 칙어'를 발표했다.

 "짐이 생각건대 우리 황조황종은 나라를 세움이 유구했고, 덕을 베풂이 깊고 두터웠다. 우리 신민이 지극한 충과 효로써 억조창생(수많은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대대손손 그 아름다움을 다하게 하는 것이 우리 국체의 정수인 바, 교육의 연원 또한 여기에 있을 터이다.

 

 그대들 신민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 부부는 서로 화목하고, 친구 간에 서로 신뢰하며 스스로 삼가 절도를 지키라. 박애를 모두에게 미치게 하며, 학문을 닦고 기능을 익힘으로써 지능을 계발하고 훌륭한 인격을 성취하라. 나아가 공익에 널리 이바지하고 세상의 의무를 넓히며, 언제나 국헌을 엄하게 여겨 국법을 준수해야 한다. 일단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길 경우에는 의용을 다하여 공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천지와 더불어 무궁할 황운을 보호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그대들은 짐의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민이 될 뿐만 아니라 족히 그대들 선조의 유풍을 현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는 실로 우리 황조황종의 유훈이자, 자손인 천황과 신민이 함께 준수해야 할 것들이다. 이는 고금을 통하여 오류가 없으며, 이를 중외에 베풀더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바가 없다. 짐은 그대들 신민과 더불어 이를 항상 잊지 않고 지켜서 모두 한결같은 덕을 닦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칙어는 일본의 일반 교육뿐만 아니라, 일본 신민 교육을 대상으로 한 기본법이었다. 천황의 명의로 발표한 것은 그 어떤 법령보다도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이 칙어는 일본인들을 대대손손 천황의 충실한 노복으로 교육하는 데 이바지했다. '교육 칙어'와 몇 년 전 천황이 발표한 '군인 칙유'로 인해 교육과 군사가 일본인들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됐으며, 이를 천황이 헌법으로 초월해 직접 통제했다. 또한 이 두 가지는 군주 전제를 강화하고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었다.

 훗날 청나라 및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식민 의식이 확고히 자리 잡아 독특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했다. 1911년, 교과서 개정이 완료된 후, 군주 전제가 공공 교육에 명시되면서 '교육 칙어'가 더 큰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허버트 빅스는 "아이들은 건국 신화 교육을 지속해서 받았으며, 천황의 신민으로서 부모를 모시듯이 천황도 극진히 모셔야 했다. 비인성적인 천황제 국가가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최고 실체의 형식으로 등장했다."라고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이 '황국 사관'은 비인성적인 친황제 국가가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최고 실체의 형식으로 등장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 황국 사관의 망령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왔다.

메이지 천황
메이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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