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46 [영국]#20_영국-스페인 전쟁, 무적함대를 격파하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해적 활동과 노예무역 등 새로운 사업에 왕실의 힘을 실어 줌으로써 당시 세계 최고의 식민제국이었던 스페인은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해상 장악력에 있어 영국 해적이 스페인 해군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해상에서의 패권을 두고 갈등이 심화되던 중, 1588년 마침내 양국 간에 일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스페인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1587년에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가 잉글랜드에서 처형당한 사건 때문이었다. 메리 여왕의 죽음이 양국 간의 오랜 종교적 갈등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종교적 동기로 잉글랜드 침공을 결정했지만, 실상은 유럽 대륙과 해외 식민지에서 스페인에 거세게 도전해 오는 잉글랜드를 격퇴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 2024. 7. 5. [영국]#19_국가가 공인한 해적들, 드레이크와 호킨스 영국의 해양 탐험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초기에 유럽 대륙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항해가들이 탐험에 성공해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새로운 상업시대에는 해로를 개척하는 것이 육로를 개척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섬나라 민족의 특성상 영국인은 이러한 이치를 다른 민족보다 먼저 터득하고 있었다. 영국은 어느 곳에서든 해안선까지의 거리가 120킬로미터를 넘지 않는다. 영국이 갖고 있는 이 지정학적인 장점이 효력을 발휘할 역사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영국의 해상무역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이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여왕은 상인들에게 권한을 위임해 무역회사를 설립하게 하고 직접 자본금을 투자했다.. 2024. 7. 4. [영국]#18_대작가 셰익스피어의 탄생과 엘리자베스 1세 대작가 셰익스피어의 탄생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리더십은 문화 예술 분야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특히 그녀는 연극에 대해 아낌없이 지원함으로써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같은 위대한 작가가 활동할 공간을 넓혀 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이전에는 서적 및 연극에 대한 검열제도가 아주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17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던 성실재판소는 언론, 출판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이곳에서 단죄받으면 참수형에서부터 사지를 찢거나 내장을 파내는 등의 잔혹한 형벌로 다스려졌다. 토머스 모어 경도 여기에서 재판받고 처형당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이런 잔혹한 처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성실재판소 과거 영국 왕실에서 정규 재판을 보완한다는 미명 아래 주로 정적을 탄압하기 위해 열던 형사재판소. 웨스트민스터 궁.. 2024. 7. 3. [영국]#17_혼담을 전략적으로 이용한 정치가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 혼담도 하나의 전략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독신으로 지낸 데에는 앞선 여러 소문도 있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할 수 있다. 그녀에게 결혼은 가장 큰 이득을 얻어낼 수 있는 일종의 수단인 셈이었다. 즉위 후 20여 년 동안 엘리자베스에게는 수많은 구혼자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결혼을 국익을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볼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미혼이라는 조건을 이용해 유럽 각국의 쟁쟁한 구혼자들을 경쟁시킴으로써 그녀 자신과 잉글랜드를 적대시하는 유럽 내 적들을 차례로 무장 해제시켰다. 이렇게 얻어낸 정치적인 실리와 두둑한 예물이 잉글랜드의 안전과 그녀의 지위를 보장해 준 것이다.엘리자베스 결혼 전략, 득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할 당시, 그녀는 꽃다운 스물다섯이었다... 2024. 7. 2. [영국]#16_엘리자베스 1세 즉위하다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의 유년 시절은 이복언니였던 메리 여왕과 마찬가지로 불행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고, 어머니는 런던탑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몸에 맞는 옷조차 제대로 없을 정도로 소외된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엘리자베스가 21세가 되던 해에 가톨릭교도였던 '피의 메리'는 신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런던탑에 가두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한 그곳에서 비바람이 치는 밤,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밤새 숨죽여 울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1553~1603)로 왕위에 오른 후,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언니 메리처럼 포악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지혜와 관용을 보여줌으로써 시공을 초월하여 현대 정치 .. 2024. 7. 2. [영국]#15_종교개혁 이후 1558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되다 헨리 8세와 영국의 종교개혁 헨리 8세의 교황의 허가 없는 이혼에 대한 보복으로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해 버린다. 어제의 동지가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버린 상황이 되었다. 헨리 8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내친김에 국왕이 곧 영국국교회(성공회의 모체)의 최고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선포했다. 다분히 희극적이지만, 영국의 종교개혁은 이렇듯 국왕이 이혼 문제로 교권에 도전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는 마치 삼류작가가 쓴 연애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하나님과 성서의 신성한 소명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종교개혁으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가 생겨났다. 그가 바로 '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머스 모어였다. 모어는 헨리가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국교회의 최고 수장 자리에 오르는 데 반대 .. 2024. 6. 27. [영국]#14_튜더 왕조의 왕권 강화 튜더 왕조의 왕권 강화 웨일스를 정복한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수렁에 빠져 10여 년을 허우적대다가 결국 프랑스까지 끌어들이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후계자들은 장장 100년이 넘게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는, 자랑스럽지 못한 기록을 남겼다. 1453년에 백년전쟁이 실패로 끝나고, 2년 만에 잉글랜드는 양대 귀족 가문인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간의 내전에 휩싸였다. 이는 '장미전쟁'이라는 낭만적인 이름 때문에 자칫 여자나 애정에 얽힌 전쟁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장미 문장을 사용하는 두 가문이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30년에 걸친 내전 동안 잉글랜드의 왕관은 귀족들의 단두대라고 할 만큼 많은 희생을 치르며 네 명의 머리 위를 전전하게 되었다. 결국.. 2024. 6. 26. [영국]#13_에드워드 1세와 스코틀랜드, 영국 의회의 발전 과정 에드워드 1세와 스코틀랜드 1296년,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인 후 스코틀랜드의 보물인 대관식용 스콘석을 빼앗아 왔다. '리아 파르'라고 불리는 이 성스러운 돌은 1998년에 이르러서야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로 반환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에 복속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원한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뿌리가 깊다. 이는 1995년에 나온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에드워드 1세는 부왕인 헨리 3세가 겪었던 수모를 보면서 귀족들이야말로 왕권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라는 생각을 품었다. 그는 시몽이 왕권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의회를 오히려 귀족 세력을 제한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귀족이 장악하.. 2024. 6. 25. [영국]#12_영국 의회의 탄생 과정 영국 의회의 탄생 오늘날 영국의 소도시 옥스퍼드는 옥스퍼드 대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매년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지만, 이 작은 소도시가 영국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던 곳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258년, 헨리 3세는 시칠리아 원정에 필요한 군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옥스퍼드에서 대규모 의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헨리 3세의 실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윽고 헨리 3세의 매부였던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가 무장한 7명의 귀족을 대동하고 궁정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헨리 3세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대신, 왕권을 제한하는 조항이 포함된 '옥스퍼드 조례'에 조인할 것을 요구했다. 국정개혁안인 이 '옥스퍼드 조례'에 .. 2024. 6. 24. 이전 1 ··· 3 4 5 6 7 8 9 ··· 28 다음